김영환은 동경음악학교를 나온 국내 첫 피아니스트였다. 1918년 8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고종 탄신을 기념해 열린 연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정말 고종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을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18년 1월 일본 유학중이던 영친왕이 잠시 귀국했다. 스물한살 영친왕은 덕수궁 석조전에 묵기로 했던 모양이다. 통치할 나라는 망했지만 왕위계승 1순위였던 그를 맞기 위해 이왕직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 와중에 매일신보에 특이한 기사가 났다. 영친왕이 어릴 때 치던 피아노를 함녕전에서 석조전으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왕세자전하께서는 사진이니 옥돌(당구)이니 승마이니 바둑이니 여러가지 고상하신 취미가 극히 너르신 중에 음악에 당(當)한 취미가 특별히 깊으시와 이번 경성에 건너오신 뒤에도 태왕전하(고종)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 왕세자 전하의 어렸을 때에 가지고 노시던 피아노 두 채를 함녕전으로부터 석조전에 옮기게 하시고 그동안 병이난 것을 악기점원이 밤을 새어가면서 급히 고쳐서 전하의 무료하실 때에 위로가 되시도록 하셨다 함은 이미 보(報)한 바어니와...’(매일신보 1918년1월26일)

안석주가 쓰고 그린 피아니스트 김영환. 머리를 피아노에 바싹 붙이고 두 손을 휘두르는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조선일보 1931년2월18일자.

◇덕수궁 함녕전의 피아노 두 대

영친왕은 근대적 취미에 관심이 많았던 것같다. 당구나 승마는 물론 골프도 좋아했다. 1927년 유럽 여행 때에도 ‘골프의 성지’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라운딩을 할 정도였다. 일본 유학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침실)으로 영친왕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영친왕은 열살이던 1907년12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함녕전에 피아노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지 않다. ‘영친왕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피아노’라는 내용으로 보아 1907년 이전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오르간, 피아노를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고종이 아끼던 영친왕을 위해 피아노를 들여오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간 뒤 주인 잃은 피아노는 방치됐던 듯하다. 10년 만에 부랴부랴 조율사를 불러 음을 맞추고 수리를 마쳤다는 얘기다.

매일신보는 영친왕의 음악 취미를 상세히 소개한다. ‘창덕궁이니 석조전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전하께서는 이왕직 양악대의 주악을 극히 만족하게 들으시며 그 수양의 연숙함을 비상히 칭찬하실 뿐아니라 잔치가 파한 뒤에는 따로 몇곡조씩 희망하시와 친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기색이 화려하심이 거의 매차례라….’(매일신보 1918년1월26일)

베를린 왕립음악원 출신 일 여성 피아니스트 오구라 스에코의 경성 연주를 소개한 매일신보 1916년12월17일자

◇13년 뒤 나온 김영환 어전연주 회고

고종의 양력생일은 9월8일이다. 하지만 1918년 고종 생일잔치는 8월31일 덕수궁에서 열렸다. 일본에 있던 영친왕이 8월에 다시 들어왔다가 9월초에 돌아가야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일정에 맞춰 생일잔칫날까지 바꿨다.

고종 생일연은 대개 아침에 함녕전에서 순종 부부 문안을 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낮에 석조전에서 왕족, 관료들의 축하인사를 받은 뒤 돈덕전에서 이왕직 아악대의 양악 연주를 들으며 서양식 오찬을 즐겼다. 저녁엔 영화, 공연 등 여흥을 즐겼다.

그런데 이날 예전에 없던 피아노 연구가 있었다는 후일담이 나왔다. 월간지 ‘동광’ 1931년6월호에 실린 기사였다. 조선인으로 처음으로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김영환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의 술회담 또 한가지-학교를 나오던 그해의 고종제(帝)생신어연(御宴)이 석조전에서 열리었을 때 그가 어전 연주를 하였다. 이것이 피아노 어전 연주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한다.그리고 하사된 금일봉이 일금 3000원야(也)라.’

1918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영환이 최초로 피아노 어전연주를 하고 거금 3000원을 사례로 받았다는 얘기다. 문제는 김영환의 어전 연주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13년 후 나온 후일담이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종의 생일축하연은 이왕직(李王職·일본 궁내부 소속으로 李王家 사무를 담당한 부서)공식행사로 매년 신문에 보도됐고 ‘덕수궁 찬시실(贊侍室)일기’나 실록에도 실릴 만큼 중요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물론, 승정원일기 후속으로 매일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찬시실일기’에도 피아노 연주는 나오지 않는다.

가장 큰 의문은 김영환이 1974년 신문에 남긴 회고에도 어전연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독부 고관집을 드나들며 상류층 부인에게 개인 레슨한 얘기까지 털어놓은 그였다. 음악가 경력 초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어전 연주’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베를린 왕립음악원 나온 日 피아니스트 오구라 스에코

오구라 스에코(小倉末子1891~1944)는 20세기 전반 일본의 대표적 여성 피아니스트다. 1909년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왕립음악원에 유학한 오구라는 1차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음악학교 교수를 지내다 1916년 귀국했다. 이듬해 동경음악학교 교수로 임용돼 후진을 양성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오구라는 경성까지 연주 여행을 왔다. 1916년 12월일 조선호텔과 YMCA에서 두 차례 리사이틀을 가졌다. 자선 음악회 성격을 띤 19일 첫 공연에는 오구라외에 경성의 외국인들도 출연했다. 총독부 2인자인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정무총감을 비롯, 경성의 유력 인사 300 명이 객석을 채웠다.

‘듣는 사람들은 다만 정신없이 실엉키듯 드나드는 파뿌리 같은 열손가락과 그 손가락을 따라서 쏟아져나오는 미묘한 소리에 취할 뿐이더라.’ 오구라 공연을 보도한 기사 제목은 ‘청중을 도취케하는 미묘한 음률’(매일신보 1916년12월21일)이었다.

오구라 스에코는 1916년 12월22일 오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피아노 연주를 했다. 매일신보 1916년 12월24일자

◇1916년 창덕궁 피아노 어전연주

오구라는 22일 오후2시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 부부를 앞에 놓고 ‘어전 연주’를 가졌다. ‘창덕궁에서는 22일 오후2시 이왕(李王)동비(同妃)양전하께서 인정전에 임하옵시고 소창말자 여사를 부르시와 피아노의 탄주를 들으셨더라. 그 채색 유리를 거쳐 들어오는 광채는 정숙히 늘어앉아있는 궁내관의 얼굴들을 비추는데 교묘한 태서명곡은 흘러나오더라. 예정한 세 곡조를 탄 뒤에 여사가 조용히 퇴좌코자 하매 비전하께서 다시 한번 곡조를 더 타랍시는 말씀이 있으셨는 고로 비전하께서 항상 가용하옵시는 악보를 두 곡조를 탄주하였는데 양전하께서는 대단히 만족하게 생각하옵시며 기념으로 순금제보석 든 부인용시계 한 개, 수서품 한 벌, 금100원을 하사하셨다더라.’(창덕궁 어전연주, 매일신보 1916년12월24일)

오구라의 어전연주는 총독부 알선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순종비 순정효왕후는 앙코르까지 요청해 두 곡을 더 들었다. 그리고 시계와 하사금을 내릴 만큼 연주에 만족했던 모양이다. 신문 기사로 확인된 최초의 피아노 어전연주였다.

◇문화재청 ‘석조전 음악회’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덕수궁 석조전 음악회를 열고 있다. 100년 넘은 이 대리석 건물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은 각별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도 연주한 적 있을 만큼 인기 높은 음악회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석조전 음악회’ 근거로 1918년 고종 탄신연 때의 김영환 어전 연주를 들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연주는 좀 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 허술한 고증(考證)에 기댄 역사 복원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참고자료

이수정, 일제강점기 궁궐 안팎의 음악: 이왕가의 음악을 중심으로,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 2022

김은영, 1910~1920년대 YMCA 음악회에서 상상한 ‘민족’, ‘경성의 소리문화와 음악공간’, 서울역사편찬원,2022

이정희, 1910년대 고종 탄신 기념 연회의 공연 양상, 공연문화연구 제35집, 2017.8

홍종인, 반도악단인만평, 동광 제22호, 1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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