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비주류’ ‘마니아용’으로 치부되던 록 밴드 음악이 최근 K팝 시장 인기 키워드로 떠올랐다. 밴드형 아이돌 그룹이 높은 음원 성적을 기록하고, 기존 록 밴드들의 무대 규모는 커졌다. 밴드풍 신곡으로 차별화를 꾀하는 대형 인기 그룹도 속속 나오고 있다.

데뷔 10년 만에 음원 차트를 독식한 4인조 그룹 데이식스. 이들은 오는 12월 K팝 밴드 최초로 2만 석 규모의 고척스카이돔에서 단독 공연을 연다. /JYP

JYP 소속 4인조 보이 밴드 데이식스는 밴드 음악 열풍의 주역으로 꼽힌다. 지난달 2일 발매한 미니 9집 ‘밴드 에이드(Band Aid)’의 타이틀곡 ‘녹아내려요’로 데뷔 10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 주요 음원 차트 정상에 올랐다. 지난달 말엔 써클차트 디지털 차트 톱 10에 노래 ‘HAPPY’(1위), ‘Welcome to the Show’(3위),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5위), ‘녹아내려요’(6위), ‘예뻤어’(8위) 등 5곡을 올렸다. 이 중 최신곡은 ‘녹아내려요’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과거 발표곡이다. 임진모 평론가는 “국내 음원 차트에서 밴드형 그룹 곡이 정상을, 그것도 역주행곡으로 차지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라며 “강렬하고 센 이미지의 록 장르 음악을 청춘을 주제로 한 대중적인 가사와 감성적인 선율로 풀어낸 게 대중을 사로잡는데 주효했다”고 평했다. 노래방 종합 차트(TJ미디어)에서도 지난 7월 10위권 중 5곡이 데이식스의 ‘예뻤어’를 비롯해 밴드곡이었다.

걸밴드로는 이례적으로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오른 그룹QWER. /타마고프로덕션

걸그룹 QWER도 밴드 음악 인기의 대표 주자다. 지난달 23일 미니 2집 ‘알고리즘스 블로섬’을 발매했다. 이후 타이틀곡 ‘내 이름 맑음’으로 멜론 톱 100 2위를 기록했고, 지난 9일 MBC M 음악 방송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음원 차트 지니뮤직 관계자는 “걸 밴드를 표방한 음악의 흥행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 4년간 연간 차트 톱 200에 진입한 여성 밴드 음악은 0건이었다”고 했다.

댄스를 주 장르로 삼던 인기 아이돌 그룹들도 밴드 음악을 신곡에 접목하고 있다. SM 소속 신인 보이 그룹 라이즈는 록 기타 소리를 앞세운 ‘겟 어 기타’ ‘붐붐 베이스’로 호평을 받았다. 걸그룹 여자아이들은 지난 1월 팝 밴드 장르의 신곡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로 멜론, 지니 등 국내 음원 차트 정상에 올랐다.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록 밴드 사운드 기반의 협업곡을 선보인 블랙핑크 로제. /더블랙레이블

밴드 사운드를 차용하는 대형 스타들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블랙핑크 로제는 미국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팝 록 밴드 스타일의 솔로 협업곡 ‘APT.’를 선보이며 스포티파이 데일리 톱 송 차트에서 K팝 솔로 여가수 최고 진입 기록(글로벌 3위, 미국 11위)을 냈다. BTS 진은 내달 15일 솔로 앨범 ‘해피’에 밴드 사운드 기반의 6곡이 수록될 것을 예고했다.

인디 록 밴드들도 활동 반경과 공연 몸집을 대폭 확장 중이다. 올 초 대표곡 ‘틱택톡’과 미니 음반 ‘머신보이’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노래와 음반을 수상한 실리카겔은 지난 5월 4500석 규모의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공연 3회를 매진시켰다. 이들의 지난 1~9월 멜론 음악 재생 수는 전년 동기 대비 209% 증가했다. 한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장충체육관은 중소 아이돌도 꽉 채우기 힘든 공연장”이라며 “최근에는 각종 축제 섭외까지 줄 이으면서 밴드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고 했다. 매년 밴드 50여 팀이 출연하는 국내 최대 규모 록 페스티벌 인천 펜타포트록 축제는 최근 3년간 역대 최다 관객 수를 매년 경신했고, 지난 8월에는 3일간 15만명을 모았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팬을 끌어모으며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밴드도 등장했다. 밴드 웨이브 투 어스는 지난해 미국 18도시에서 연 투어 공연을 전석 매진시켰고, 지난달 16일 미국 25도시를 도는 두 번째 북미 투어를 시작했다. 세계 최대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의 월 구독자 수가 830만명으로, 웬만한 대형 기획사 보이 그룹의 구독자 수보다도 많다.

평론가들은 밴드 열풍의 이유로 코로나 직후 라이브 공연의 인기 상승과 댄스 장르 일색인 K팝 음원 차트에 대한 싫증을 꼽는다. 임희윤 평론가는 “코로나 격리 기간 전 세계 10~20대 사이 생생한 현장감이 넘치는 밴드 라이브 공연을 향한 욕구가 커졌다”며 “취향에 맞는 음악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집하는 일명 ‘디깅(digging·발굴)’ 문화가 활성화된 것도 비주류로 치부되던 밴드 명곡이 발굴될 기회를 높였다”고 분석했다.

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직접 곡을 쓰는 아이돌이 록 장르 노래를 내는 등 밴드 곡 유형이 다양화되면서 차트에 착시효과가 커진 측면도 있다. 기존에는 록 밴드로 볼 수 없던 그룹들까지 밴드 음악 인기를 이끄는 경우가 늘어난 반면, 정통 밴드의 텃밭인 홍대 관객 수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며 “K팝 한류 영향이 길어지면서 댄스 말고도 다양한 한국 음악을 발굴하고 싶은 해외 팬들의 욕구, 라이브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대형 음악 축제를 통해 인기 상승을 꾀하는 아이돌들의 전략이 맞물린 영향이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