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쯤 배우 송강호는 시나리오를 하나 받아들었다. 참으로 촘촘하고 밀도가 꽉 찬,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출연은 거절했다. 감독이 문제였다. 세 번째 장편 연출이라는데 앞서 두 작품이 폭삭 망했다. 그 감독이 만든다니 이상한 영화가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만나나 보라는 제작사의 권유에 찾아간 사무실. 바바리를 입고 좁은 복도를 지나 천천히 걸어오는 감독을 보고 송강호는 마음을 바꿨다. “정말 지울 수 없는 품격, 기품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 순간 믿음이 가더라고요.”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CGV 영화관에서 열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개봉 25주년 기념 토크 자리에서 송강호는 ‘JSA’ 출연 뒷얘기를 밝히며 “배우 30년 동안 숱한 굴곡이 있었지만 ‘JSA’는 잊히지 않는 첫 번째 화양연화”라고 말했다. 송강호를 압도한 ‘품격 높은 바바리맨’인 박찬욱 감독은 “‘JSA’마저 실패하면 감독을 못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심정으로 만들었다”며 “이후의 제 영화는 ‘JSA’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토크 자리에는 박 감독과 송강호 외에도 ‘JSA’에 출연한 이병헌, 이영애, 김태우가 함께 참석했다. 2000년 9월 개봉한 ‘JSA’는 남북 군인의 우정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극적으로 드러내 580만명 이상을 모으며 그해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한국 영화 최초로 남북 관계를 인간적으로 풀어내며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는 높은 평가를 받아 해외에서 박 감독이나 이병헌이 소개될 때도 빠짐없이 언급된다.
‘JSA’는 출연 배우들의 연기 인생도 바꿨다. 이병헌은 그전 작품인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 등 하는 영화마다 흥행에 실패해 앞길이 어두웠다. 이병헌은 “처음으로 흥행 배우가 된 감격에 ‘JSA’를 극장에서 40번 정도 봤다”며 “외국에 가서 저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대표작”이라고 했다. 영화 데뷔작인 ‘인샬라’(1997)가 흥행과 비평에서 혹독한 결과를 맞았던 이영애에게도 절실한 작품이었다. 이영애는 “20대 말에 만난 JSA는 화창한 30대를 보낼 수 있게 해준 기적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25년 전만 해도 민간인도 아닌 군인이 주적(主敵)인 북한 측과 교류한다는 내용이 위험하게 받아들여질 소지가 다분했다. 박 감독은 “여차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받을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로 찍었다”며 “개봉 석 달 전 6·15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돼 그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고 밝혔다. 박 감독은 “50주년 토크 때는 남북 긴장을 옛날 얘기처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그땐 (이 자리에 참석 못 한) 70대 하균이(신하균)를 꼭 데리고 오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CJ ENM의 고경범 영화사업부문 부장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 영화 시장에 제2의 ‘JSA’가 나올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