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왕박쥐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거꾸로 매달린 작은날여우박쥐가 날개를 웅크렸다 피고있다. /페이스북 @Lubee Bat Conservancy
말레이왕박쥐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거꾸로 매달린 작은날여우박쥐가 날개를 웅크렸다 피고있다. /페이스북 @Lubee Bat Conservancy

선거 등 커다란 정치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소환되는 동물 두 녀석이 있어요. 하이에나와 박쥐입니다. 하이에나는 썩은 짐승 사체만 탐닉하는 비열하고 음흉한 동물로 정적에 빗대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됩니다. 젖먹이 짐승인데도 날개로 훨훨 날아다니는 박쥐는 짐승도 새도 아닌 회색분자로 지목돼 상대방을 기회주의자로 능멸할 때 동원됩니다. 왜곡과 편견이 낳은 서사입니다.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못지 않게 피가 철철 넘치는 생고기도 탐닉합니다. 치타는 한 방에 날려버리고 표범과 사바나 넘버 투를 다툴 정도의 맹수입니다. 박쥐는 더 억울해요.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며 생태계 유지를 책임지고 있는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지조없는 존재’로 그려지곤 하죠.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늙은이박쥐의 얼굴을 근접촬영한 모습.
/National Park Service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늙은이박쥐의 얼굴을 근접촬영한 모습. /National Park Service

우중충한 몸색깔을 하고 깊은 밤 활동하는 야행성이라는 점도 박쥐에 대한 편견을 더해줍니다. 이렇게 어둠의 세계를 대표하는 짐승으로 첫손에 꼽히는 박쥐들의 한을 풀어주는 날이 1년에 한 차례 있습니다. 매년 4월 17일로 지정된 세계 박쥐의 날(International Bat Appreciation Day)이예요. 이날에 맞춰 세계 환경 단체와 동물원, 연구기관 등이 일제히 박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오해를 풀어주는 내용의 다양한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쏟아냅니다. 박쥐를 근접촬영한 다양한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박알못’이더라도 일정한 흐름을 포착할 수 있을 겁니다. 생김새에 따라 박쥐가 크게 양대 파벌로 나뉜다는 사실을요.

미국 텍사스주의 한 동굴에 멕시코꼬리박쥐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Texas Parks and Wildlife
미국 텍사스주의 한 동굴에 멕시코꼬리박쥐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Texas Parks and Wildlife

그렇습니다. 박쥐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큰 박쥐와 작은 박쥐로요. 단순하게 덩치만 차이가 나는게 아닙니다. 큰박쥐와 작은박쥐의 차이는 아프리카 코끼리와 아시아 코끼리의 차이보다도 넓고, 사람과 침팬지의 다른점보다도 아득할 수 있어요. 저런 놈들이 단지 날개달린 짐승이라는 이유로 박쥐라는 한통속으로 묶인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우선 작은 놈들부터 살펴볼까요? 집박쥐·관박쥐·애기박쥐 등으로 불리는 무리들인데요. 눈코입을 보면 묘하게 삐쭉하거나 바닥에 뭉갠 듯 찌그러져있거나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며 뒤틀려있습니다. 초음파를 발사해 반사파를 받아내며 어두운 밤 항로를 찾는 특유의 습성에 걸맞게 얼굴 형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작은 박쥐 중 스타급 명성을 가진 흡혈박쥐. /University of Georgia

하늘을 활공하며 벌레와 거미,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 솜씨좋은 사냥꾼들이죠. 괴수의 풍모가 묻어나지만 몸집은 작습니다. 기껏해야 몸길이는 10㎝ 정도에 불과해요. 자칫 눈앞에 보이는 놈을 겨냥해 박수라도 쳤다간 그 자리에서 몸뚱이가 터져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박쥐 무리들은 우리에게도 제법 친숙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식하고 있는 27종의 박쥐는 모두 작은 박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다음에 소개할 녀석들의 존재가 더 낯설고 신비롭고 기묘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박쥐와 모든 면에서 대척점을 이루는 괴수중의 괴수 큰박쥐 말입니다. 우선 사진부터 보실까요?

세계에서 가장 큰 박쥐로 알려진 황금볏과일박쥐. /iNaturalist.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박쥐 특유의 자세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놈은 거대한 괴수같습니다. 움켜쥔 발톱 끝에 나뭇가지 끝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여요. 오똑한 콧날에 쫑긋 선 귀에 똘망한 눈동자... 머리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영락없이 갯과 맹수가 떠올려질법해요. 큰박쥐류의 대표종이자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박쥐 중 하나인 황금볏과일박쥐입니다. 양쪽 날개를 활짝 편 너비는 무려 1.5m가 넘습니다. 앞발과 연결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모습을 아래에서 내려다보면 피막은 스크린같고 뼈대와 몸뚱아리는 SF영화의 괴수 같아요. 그 옛날 공룡 세상에서 하늘을 호령하던 프테라노돈의 귀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은날여우박쥐가 거꾸로 매달린 채 하품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 @Lubee Bat Conservancy

이렇게 큰박쥐 일파는 덩치와 외모에서부터 압도적입니다. 황금볏과일박쥐, 비슷한 덩치의 인도과일박쥐, 말레이과일박쥐 등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날개를 접거나 온몸으로 감싼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실사판 배트맨입니다. 왕박쥐로도 불리는 이놈들은 위압감 넘치는 덩치에다 하나같이 개의 주둥이를 하고 있어요. 프테라노돈과 늑대가 파격적 흘레를 붙으면 이런 모습이 나올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큰박쥐들을 박쥐의 영어 통칭인 배트(bat)가 아닌 별도의 명칭으로 부릅니다. 바로 ‘날아다니는 여우(flying fox)’죠. 이들이 작은박쥐처럼 기묘하게 눌리거나 꼬인 얼굴 형태를 하지 않았다는 건 박쥐의 전매특허인 초음파보다는 전통적인 시각에 의존해서 비행하고 먹이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작은박쥐보다 상대적으로 덜 진화한 원시적인 무리로도 얘기되죠.

작은날여우박쥐가 거꾸로 매달린 채 과즙을 빨아먹고 있다. /페이스북 @Lubee Bat Conservancy

동굴이나 폐가처럼 실내 공간에서 집단으로 무리지어사는 작은 박쥐들과 달리 큰박쥐들은 통상 숲속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비바람을 온전히 견뎌냅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이빨을 드러내보이는 놈들을 보면 오싹함이 피어오릅니다. 어둑한 저녁 호젓한 숲길을 걷고 있는데 코앞에서 1m가 넘는 날개를 퍼덕이며 왕박쥐가 날아오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섣불리 몸서리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은 절묘합니다. 작은 박쥐들과 비교할 수 없는 덩치와 파워를 지닌 큰박쥐의 입맛을 초식성으로 묶어뒀거든요. 이게 박쥐 패러독스입니다. 날아다니는 여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놈들의 주식은 바나나·망고·무화과 같은 열대 과일 아니면 달착지근한 꽃꿀입니다. 사냥을 해서 고기를 으적으적 씹어먹는 놈들, 심지어 살아있는 드라큐라 격인 흡혈박쥐까지도 죄다 작은박쥐에 속하는 것과 완벽한 대비구도입니다.

중간 크기의 박쥐에 속하는 작은긴코박쥐가 꽃술을 파먹는 장면을 옆에서 근접 촬영했다. /Merlin D. Tuttle, Bat Conservation International. U.S. department of Interior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덩치와 파워까지 가진 큰박쥐들이 육식입맛까지 가졌다면요. 별일이 다 일어났을 겁니다. 공중에서 낙하해서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를 채가 나무위로 가져간 뒤 꿰에엑 꼬끼오 절규하는 새들의 깃털속으로 주둥이를 파묻고 거칠게 내장과 살코기를 뜯어내는 포식 장면이 일상화됐겠죠. 잉어·가물치 같은 대형 물고기는 물론 어지간한 크기의 뱀들까지 이들의 식단에 포함됐을 것입니다. 혹여 사람이 습격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을지 몰라요. 하지만 이 대형 괴물 박쥐들의 입맛은 철저하게 초식으로 설계됐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박쥐와 큰 박쥐에는 각각의 습성에 맞춰 제각각의 생태계 수호 임무가 부여됐습니다. 벌레를 먹어치우는 작은 박쥐는 특정 곤충이 과잉번식하지 않도록 개체수를 조절하고 벌레 몸을 통해 전염병이 퍼지는 일도 막아줍니다.

호주에 서식하는 검은왕박쥐. /Tom Mumbray. Queensland Government Australia

베지터리언인 큰박쥐에게는 좀 더 우아한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가루받이입니다. 이들이 과일을 찾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고, 꽃꿀을 홀짝이기 위해 꽃과 꽃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암수 식물의 연을 이어지며 대를 잇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벌이나 나비 등과는 비교가 안되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가루받이입니다. 이렇게 다소 기괴하고 험상궃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본능대로 살아가며 생태계의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는 박쥐들입니다. 그럼에도 놈들을 간에 붙네 쓸개에 붙네 하며 정체성도 불분명하고 지조도 없는 간신배에 빗대는 걸 보면, 인간이라는 종자는 정말 속이 배배 꼬여도 단단히 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