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조 미디어아트 작가 태싯그룹의 장재호(왼쪽), 가재발이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 출품작 ‘Morse ㅋung ㅋung’ 앞에 섰다. LED 전구 2000개가 달린 166x166㎝ 크기의 사각형 기계 3대가 글자와 소리를 동시에 구축한다. “주기가 바뀔 때마다 매번 미세하게 다른 음향이 연주된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ㅡ→ㅋ→쿠→쿵, 획의 변화와 정확히 호응하며 전자음악이 쿵쿵쿵 지축을 울린다. 전시장에 놓인 대형 화면 세 대에서 빨간색 LED 전구 6000개가 연쇄적으로 깜빡이며 글자와 소리를 토해낸다. ‘쿵’으로 진화한 글자는 이윽고 ‘킹’ ‘콩’ ‘빵’ 등으로 변이하다 해체된다. 글자가 변하면 소리도 따라 변하고, 글자가 이지러지면 소리도 이지러진다. 두 요소가 끊임없는 합주를 이룬다. “음양(陰陽)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듯, 시각과 청각이 한 몸처럼 작동하는 것이 핵심이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하는 2인조 미디어아트 작가 태싯그룹의 예술관은 소리와 글자의 이치가 다르지 않다는 훈민정음 창제 원리 ‘이기불이’(理旣不二)와 일치한다. 작곡가로 활동하던 장재호(51)·가재발(50)이 의기투합해 2008년 결성한 태싯그룹은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장르의 선구자다. 타자기와 피아노의 결합을 떠올리면 쉽다. 키보드로 ‘ㄱ’을 누르면 화면에 ‘ㄱ’이 뜨고, 동시에 ‘ㄱ’에 해당하는 전자음이 스피커로 울려 퍼진다. 즉석 공연 위주로 활동하는 이들이 무대에 올라 채팅하듯 ‘안녕하세요’라고 노트북을 두드리면, 무대 뒤편 화면에 ‘안녕하세요’가 뜨는 동시에 각 초·중·종성에 해당하는 음향이 조합되며 독특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식이다.

악기 대신 컴퓨터 언어인 코드(code)를 입력해 음악 생성 기반을 만든 뒤, 이를 즉흥으로 변주한다. “처음엔 ‘라이브 코딩’ 장르를 추구했다. 화면에 낯선 프로그래밍 언어가 뜨면서 이에 상응하는 음향이 나오는 것이다. 일반 관객에겐 난해하다. 보기 쉽고 재밌는 방식은 없을까? 고민 끝에 한글을 도입했다.” 2009년 ‘훈민정악’(訓民正樂)이 탄생했다. 한글 자모(字母)가 소리로 치환되고, 공연자가 채팅으로 건네는 대화가 음악이 되는 퍼포먼스다. “성대에서 만들어지는 초성의 파형이 중성의 입모양에 따라 변형된다. 훈민정음의 원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장재호) “한글의 조형적 특성에서 출발했지만 관객들과의 너무도 훌륭한 소통 수단이었다. 우리의 예술적 본질이 됐다.”(가재발)

음악과 해당 계이름이 한글로 화면을 채우는 태싯그룹의 'In C' 공연 장면. /태싯그룹

한글 실험은 이번 출품작 ‘Morse ㅋung ㅋung’으로 이어졌다. “길고 짧은 두 음으로만 뜻을 전달하는 모스 부호에 흥미를 느꼈고, 이걸 한글에 대입했다. 한글도 디지털 요소가 강하다. 제한된 조합의 가능성 속에서 구현되고, 직선·네모·세모 등 기하학적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공연용으로 창작된 것이지만, 처음으로 전시용이 제작·설치됐다. 특별 개발한 움직이는 글꼴, 이른바 ‘태싯그룹체’까지 적용됐다. 전시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 전시실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전 세계를 돌며 작품을 선보인다. “2012년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In C’라는 작품에 감명받은 디렉터가 초청한 것이다. 연주에 맞춰 ‘도레미파솔…’ 등 한글 계이름이 화면을 채운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같다. 우리가 ‘공연 장소가 미국이니 영어 버전으로 제작하겠다’고 했더니 디렉터가 거절하더라. 관객이 한글을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보다 더 한글의 과학성에 열려 있더라.”

한국예술종합학교 사제지간으로 만난 두 사람 모두 작곡가지만, 배경은 다르다. 장재호는 쇼팽에 심취해 클래식 음악에서 시작했고, 가재발은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대표와 함께 ‘바나나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두 경계가 혼융돼 하나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세상은 자꾸 구분하려 한다. 음악인가? 기술인가? 미술인가? 게임인가? 우리는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 애매한 지점을 건드린다.” 과학이자 음악이고 미술이자 놀이다. 이것이 한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