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New), 뉴 보테가!”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패션계에서 ‘새로운 걸 더욱 새롭게’ 보이게 한다는 것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도 없다.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한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이탈리안 럭셔리 패션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2022 겨울 컬렉션 패션쇼. 지난해 11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의 데뷔 쇼이기도 하다. 그 누구보다도 주목받았던 ‘2인자’에게 진정한 월계관이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지난 2월 26일(현지시각)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본사가 될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쪼 산 페델레 (Palazzo San Fedele)에서 열린 이번 쇼는 아직 ‘공사중’인 본사의 모습 마냥 미래를 짓는 블라지의 큰 그림을 보는 듯 했다. 보테가 베네타의 미래는 블라지 자신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물들게 했다. 재활용 파쇄기(crusher)에서 나온 금속으로 감싼 의자 위엔 관람객을 위한 검은 방석이 놓여있었고, 그 검은 방석이 나중에 쇼에 등장하는 가방 모양의 원형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검은 방석 모양의 가방은 보테가 베네타 초기 디자인을 차용한 것. 보테가 베네타의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를 깨닫고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블라지의 ‘실험 정신’에 경쾌한 맞춤표를 찍는 장면이다. 서울에선 밀라노에서 선보였던 무대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청담동 송은아트센터 지하에 구현됐다. 기둥 사이로 등받이 없는 은박 좌석에 검은 쿠션이 야무지게 얹혀있었다.
◇뉴, 뉴 보테가를 여는 완벽한 서문
‘새로움(new)’에 ‘새로움’을 더 한 건, 그의 전임자가 보였던 행보 때문. 이탈리아 장인정신이 그대로 담긴 ‘인트레치아토기법’(가죽을 서로 꼬아서 만드는 것)은 살리면서, 세련되면서도 개성 강한 디자인으로 거의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일으킨 바 있다. 이탈리아 국기를 연상시키는 초록색을 두고 안정감 보다는 팝아트적 감각으로 관능적으로 표현해 냈다. 이는 곧 브랜드를 대표하는 ‘보테가 그린’으로 재창조됐다. 고귀하고 클래식한 브랜드 이미지를 젊은 세대가 가장 열광하는 스타일 중 하나로 완전히 탈바꿈시켜놓은 것이다. ‘뉴 보테가’란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그런 전임자의 뒤를 잇는 마티유 블라지의 첫번째 쇼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쏟아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그의 첫 의상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일부의 ‘물음표’는 ‘느낌표’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파리 태생의 벨기에 디자이너인 그는 라프 시몬스의 남성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시작으로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아티자날’ 라인과 여성 레디투웨어 쇼 디자인을 담당했다. 2014년에는 피비 파일로가 이끈 셀린느의 시니어 디자이너로 활약한 바 있으며,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와 함께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을 맡아왔다.
프랑스의 탐미주의적 감각과 벨기에의 진보적인 철학을 지닌 그는 현대적이지만 클래식한 장인정신을 담은 이탈리아 브랜드의 DNA를 적확히 파고 들었다. 그는 자신의 ‘첫 인상’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브랜드 미학을 오롯이 보여줄 수 있는 기술적 해학을 ‘첫 의상’으로 표현했다. 흰색 탱크탑과 통이 다소 낙낙한 청바지로 보이는 의상에서다. 그냥 보면 ‘창의력 제로’에 가까운 이 의상은 현장에 있는 모든 이의 박수와 탄성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흰색 민소매 의상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무결점의 솜씨를 은유했다. 그리고 청바지는 청바지가 아니었다. 가죽으로 된 누벅을 데님처럼 인쇄되게 만든 것이다. 유연한 가죽이 펄럭일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사뿐한 모델의 발걸음이 더욱 역동적으로 보였다. 브랜드의 전통이자 브랜드가 가장 잘 다루는 ‘가죽’으로 그는 마법을 부린 것이다. 생각의 전환. 그것은 ‘뉴, 뉴 보테가’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이었다.
◇보고 또 봐도 새로운 게 보인다.
그 뿐인가. 검은 색 싸이 하이 부츠에 맞춰 입은 흰색 오버사이즈 셔츠는 그냥 면셔츠가 아니다. 바로 가죽으로 된 셔츠였던 것. 언뜻 알아채기 어렵지만 가까이 보면 조금 달라 보인다. 무엇보다 빨리 입어보고 싶은 그 기분이라니! 보드라운 감촉에 피부에 매끄럽게 펼쳐질 가죽의 느낌은 이채로움 그 자체다. 고도화된 장인정신에 대한 블라지식(式) 경외감이 경이로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옷은 제작자와 착용자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 움직임과 감정의 교환을 담았다. 일회성이나 눈에 보여지는 화려한 볼거리가 아닌 착용자가 느끼는 사적인 즐거움이라는 ‘조용한 힘’에 집중한 것이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앞으로 펼쳐나갈 여정에 대한 서문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정찬이 있을까. 2020년부터 브랜드에 합류했던 블라지는 전임자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려 하지 않았다. 동시에 과거에 대한 더 깊은 탐험으로 보테가 베네타가 더 유서 깊은 브랜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장인정신을 내건 수많은 브랜드 중 보테가 베네타의 ‘원천기술’을 따라올 이가 없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하는 듯했다.
의상은 360도로 바라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남색 피코트(라펠이 달린 엉덩이 길이의 직선형 겹 여밈 코트. 더블 브레스티드로 길이가 짧은 편인 코트)가 등장할 때부터. 앞에선 여느 피코트와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디자인이지만 모델이 지나가는 순간, 사람들의 입은 경탄으로 절로 벌어졌다. 등뒤로 구부러지는 곡선은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남색 브이넥 민소매 원피스는 어깨끈이 패딩으로 돼 어깨 위에 봉곳 솟았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있게 옷감의 형태감을 살리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몸선을 타고 내렸다.
연노랑빛과 라벤더 색상의 가죽 치마는 모두의 1순위에 오를 만큼이나 혁신적이었다. 몸에 맞는 니트와 어우러져 실용적인 듯 하면서도 파티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차림이었다.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흐름을 대표하는 화가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조각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치마는 앞 뒤가 다른 길이로 재단돼 같은 걸음에도 속도감이 느껴졌다. 비범한 패턴은 빛에 따른 움직임을 증폭시켜 한결 더 풍성하면서도 무겁지 않아 보인다.
박음질 하나 없이 가죽을 인트레치아토 기법으로 독특하게 엮어낸 칼리메로(Kalimero) 백, 하나의 가죽을 엮어 만든 인트레치아토 싸이하이 부츠까지 급진적이고 반복적인 실루엣이 주를 이룬다. 보치아니의 작품을 둘러보듯, 과거를 천착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보치아니 작품이 보여준 해체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속도감처럼 기존과 또 다른 감각을 선보인다. 보테가 베네타가 아니고서야 누가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 넘치는 시도다.
◇일회적 화려함 대신 착용자편에 선 ‘조용한 힘’
블라지가 과거 경험했던 캘빈 클라인 스타일을 살짝 담은 리버 레이스는 여전히 18세기 방직기로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21세기판 합성 저지를 레이어드 하는 블라지의 유쾌함이 보는 이의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현장을 찾은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의 감격스러운 웃음은 또 한명의 스타를 발굴한 패션계의 설렘을 대변하기도 했다.
그 어디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그렇기에 인간적인 품이 더욱 그리워지는 그 곳을 감싸안은 관람객들의 온기는 금속성 의자와 덜 완성된 철골 구조물 사이를 맴도는 휑한 공기를 어느 새 뜨거운 훈풍으로 바꾸어 놓았다. 송은 아트센터 대형 스크린으로 비치는 현장의 열기나, 송은 아트센터를 찾은 이들이 보내는 뜨거운 박수 모두, 가시지 않은 겨울의 냉기를 사라지게 했다. 기존의 상징이 된 초록색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노랑, 갈색, 빨강, 연보라 등 다양하게 펼쳐낸 컬러 팔레트나, 울 플란넬과 헤링본 소재 역시 단순함을 거부하고 컬러와 질감을 차별화했다. 독특하게 디자인된 니트나 소재가 더욱 궁금해지는 성긴 니트 스타일의 상의 역시 블라지의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모델들은 가죽 필로우(베개) 백을 움켜쥐어 클러치 백으로 연출하기도 하며, 집안 인테리어에도 어울릴 것 같은 인트레치아토 박스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왜?’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지만 ‘왜 안돼?’라는 역질문으로 착용자의 제스처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이 옷을 어떻게 입고, 이 가방을 어떻게 들 것이며, 이 아이템들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는 착용자의 결정이며, 제작자는 그 결정을 존중하고 격려하기 때문이다.
<하단은 쇼의 몇몇 디테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