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한다는 게 막걸릿집 사장이냐?”
7년 동안 아버지는 아들이 차린 가게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대기업 사장을 지낸 60대 아버지에게, 연세대 경영학과(01학번)를 나와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컨설턴트로 첫발을 떼고 이후 소셜커머스 업체 티몬의 전략기획실장으로 스카우트돼 간 아들이 30대에 ‘술집 사장’이 됐다는 소식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레스토랑 가이드 ‘미쉐린’이 서울에서 가성비 높은 밥집 60곳을 선정한 2021 빕 구르망에 아들 가게가 이름 올리자 부자 사이가 변했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60년 독자세요. 친구분들께 신문을 펼쳐 보이며 ‘우리 아들이 하는 데야’ 자랑하셨답니다.” ‘한국술집 안씨막걸리’ 주인 안상현(37)씨가 활짝 웃었다.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에 들어서면 7년 동안 우리 술을 판 안씨막걸리가 눈에 띈다. 여기선 탁주(막걸리), 청주(약주), 증류주(소주)만 판다. 한잔 술에 한입 거리로 먹기 좋은 안주가 차림표에 소복하다. ‘막걸리엔 파전’ 같은 뻔한 메뉴는 이 집에 없다. 막걸리는 무조건 싸야 하고 파전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었다. 도정한 지 2주 이내 쌀로 주문과 동시에 압력솥을 돌린다. 갓김치도 직접 담가 손님 상에 낸다. 집밥처럼 편안한데 뜯어보면 감각이 살아있다. 매달 전 직원이 지리산에 내려가 약선음식 전문가(고은정)에게서 제철 식재료를 배워오는 것에 상상력을 더한 결과다.
◇오징어에 만두 넣고, 굴에 키위 갈아 얹고
혼술할 때 아빠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안주는 어떻게 만드는지 안 대표에게 물었다. “냉장고 열면 먹다 남은 볶음밥이나 꽁꽁 언 만두가 있을 거예요. 쫑쫑 다져서 오징어 몸통에 집어넣고 에어프라이어에 데우면 혼자서도 근사한 술상을 차릴 수 있죠.” 편의점에서 파는 흑임자 소스를 먹물처럼 뿌리면 고소한 풍미를 더할 수 있다. 3년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주로 나온 ‘풍정사계(楓井四季)’, 그중에서도 봄을 뜻하는 ‘춘(春)’은 가벼운 단맛이 도는 맑은 청주인데 오징어순대와 궁합이 좋다.
가리비는 요즘이 제철이다. 폭 쪄서 김을 손으로 뜯어 올리고 양파를 잘게 썰어 뿌려주면 ‘아삭한 짠맛’ 도는 가리비찜이 된다. 보드카가 어울리고, 쌀 대신 밀로 빚은 진맥소주는 톡 쏘는 맛이 있어 어패류나 뜨끈한 국물에 잘 맞는다.
번드르르한 속살을 뽀얗게 내미는 굴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안 대표는 얼린 키위를 곱게 갈아 굴 위에 얹는 방식을 택했다. “굴의 싱그러운 바다맛과 키위의 향긋한 단맛이 어우러져 소주 안주로 딱”이다. 사과 등 다른 과일도 좋다. “굴은 미끄덩한데 과일은 사각사각 씹히니까 ‘조직감의 반전’이 미각을 사로잡죠.”
◇사케 병 보며 한국술 도약 꿈꾸는 ‘와신상담’
외국계 회사를 다닐 때 늘 궁금했던 한 가지. “왜 우리나라 기업들은 ‘빠른 추격자’ 전략만 추구하는가, ‘선도자’를 꿈꿀 때도 되지 않았나.”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삼성을 애플의 ‘흉내쟁이’라 비꼬는 걸 보고 분기탱천했다. 2013년 경리단길에 수제 맥주 붐이 이는 걸 보고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한국술집을 만들리라’ 결심했다”.
전국 술도가를 뒤져 달고 담백하고, 가볍고 무겁고, 과일맛 나고 곡물맛 나는 이른바 ‘한국술 맛 분석표’를 만들었다. 막걸리 ‘꽃잠’은 지리산 ‘옛술도가’ 송승훈 대표가 전통 방식으로 누룩을 만들어 빚는다. 담백하고, 약간의 탄산 기포가 있어 상쾌하다. 드라이한 막걸리에 최고 안주는 굵은 왕소금. “소금을 혀 밑에 넣어둔 채 꽃잠을 입에 담으면 숨겨져 있던 단맛과 감칠맛이 살아나죠.”
그는 요즘도 빈 사케 병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일본의 유명 축구선수 나카타 히데토시가 400년 된 일본 최고 양조장과 손잡고 선보인 200만원짜리 고급 사케 병이다. “지금 당장 한국술과 안주로 세계 최고 수준인 프랑스 와인과 일본 사케를 이길 거라 과신하진 않아요. 하지만 한국술과 안주가 세계 중심이 되게 만드는 건 저의 과제이자 우리의 숙원이죠. 그날을 위해 끝까지 도전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