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래 쥐고 있으면 미나리가 상해서 팔지 못한다고요.” 친절하게 미나리 씻는 법을 알려주던 윤수업(55) 경북 청도 평양1리 이장님 목소리에 슬슬 짜증이 묻어났다. 그가 알려준 미나리 세척법은 이랬다.
“미나리 한 다발을 거꾸로 잡고 물에 담가서 세차게 흔들어 흙을 털어냅니다. 미나리를 돌려 잡고 줄기 끝을 물통 벽에 툭툭 쳐서 가지런히 한 다음 양 갈래로 나눠 쥐고 흔들어서 줄기에 붙은 마른 이파리를 떼어내고, 다시 한 다발로 모아 쥐고 잎 부분을 부채처럼 활짝 펴고 흔들어서 마른 잎을 떼어낸 뒤 바구니에 담습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흙을 털어내긴 쉬웠지만, 마른 잎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강하게 손목을 채지 않으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세게 쥐면 줄기가 부러졌고, 살살 오래 씻으면 작업이 지체됐다. 지켜보던 윤 이장이 마침내 “이제 그만큼 해봤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했다. 돕기는커녕 해를 끼친 것 같아 얼른 옆으로 비켰다.
◇영화 ‘미나리’ 美 68관왕 돌풍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가정 이야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가 미국 내 각종 시상식에서 68관왕에 올랐다. 4월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도 여러 부문 수상 후보로 거론된다. 영화가 주목 받으면서 제목도 화제가 됐다. “미나리가 무슨 뜻이냐”는 외국 기자들 질문에 한국계 미국인 정이삭 감독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채소를 뜻한다”고 밝혔다. 영화는 다음 달 3일 국내 개봉한다.
영화 속 가족처럼 정 감독은 미국에 이민 간 부모를 뒀다. 미국 남부 아칸소주(州) 시골 마을에서 농장을 운영한 아버지와 직장에 다닌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돌봐준 외할머니는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아칸소에서 키웠다. 정 감독은 “미나리가 다른 채소보다 잘 자라는 모습이 기억에 강렬히 남았다”며 “미나리의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이 우리 가족과 닮았다”고 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한민족을 대변하게 될 미나리는 한반도 어디서나 잘 자란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미나리는 경북 청도 한재에 있다. 청도읍 초현리·음지리·평양리·상리 일대 계곡을 한재라 한다. 화악산과 남산을 잇는 능선이 청도읍·풍각면·각남면을 가르는 큰 고개라 ‘한재'란 이름이 붙었다.
한재 일대에서 생산하는 미나리는 국내 최초로 특허청에서 ‘지리적 표시 등록'을 취득한 미나리다. 지리적 표시 등록의 사전적 정의는 ‘상품의 품질과 지역이 큰 관련이 있을 경우 그 지역에서만 지역 이름을 쓸 수 있게 하는 제도’. 한재에서 생산하는 미나리가 다른 지역과 다른 맛을 가졌다는 뜻이다. 전국 최초 미나리 무농약 재배 품질 인증도 받았다.
◇한재 미나리 맛이 어떻길래
막 씻은 미나리 한 줄기를 입에 넣고 씹어봤다. 사각사각 경쾌하게 끊겼다. 특유의 화사하고 상쾌한 향기가 코로 올라왔다. 서양 채소 셀러리와 비슷하다. 영어로 미나리가 ‘water celery(워터 셀러리)’ 또는 ‘water parsley(워터 파슬리)’. ‘물 셀러리’ ‘물 파슬리’라 부를 만하다. 잘린 줄기 단면을 보면 일반 미나리와 달리 빨대처럼 텅 비지 않고 꽉 차 있다.
미나리는 물을 뜻하는 옛말 ‘미’와 나물을 뜻하는 ‘나리’가 합쳐진 말이다. 이름 자체가 ‘물에서 나는 나물'일 정도로 미나리 농사는 물이 중요하다. 청도 화악산과 남산 계곡을 따라 이뤄진 한재마을은 물이 풍부하다. 이 지역 미나리 농가에서는 화악산 지하 200m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를 미나리 농사와 세척에 사용한다.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연중 내내 섭씨 18도 정도를 유지한다. 게다가 미나리는 일조량이 풍부해야 쑥쑥 자라는데, 한재는 계곡이지만 남동향이라 빛이 잘 든다.
한재에서는 1960년대 자투리 논에서 미나리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 청도 시장에서 출하한 상업적 재배의 시초다. 370여 농가에서 연평균 2000톤을 생산해 210억원 가까운 소득을 올린다. 한재에 들어서면 비닐하우스 수천 동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윤 이장은 “난방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노지보다 따뜻해 미나리의 성장과 품질 관리를 위해 하우스에서 재배한다”고 했다.
미나리 수확은 새벽 4시 시작한다. 아직 캄캄한 밤 어른 키 높이의 나지막한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서면 온통 초록빛이다. 미나리가 무릎 높이까지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미나리는 8월 중순이면 심기 시작한다. 영화에서처럼 씨를 뿌리는 게 아니라 지난해 농사 때 미리 거둬둔 미나리 줄기를 땅에 뿌리고 밟아주면 뿌리가 자란다. 뿌리가 잠길 정도로 물을 줘야 썩지 않고 잘 자리 잡는다.
대개 미나리는 수확 때까지 계속 물에 잠기게 해서 키우지만, 한재 미나리는 물을 넣었다 빼는 작업을 반복한다. 하우스 지붕에 스프링클러가 달려 있어서 밤에는 물을 주고 낮에는 물을 뺀다. 윤 이장은 “한재 미나리 특유의 식감은 이런 재배 방식과 물, 토양이 삼박자를 이뤄 만들어낸다”고 했다. 밭에서 물을 줘 키우는 밭 미나리는 짧고 속이 꽉 찬 반면, 물을 대고 키우는 논 미나리는 성장이 빨라 길고 속이 비어 있다. 한재 미나리는 밭 미나리와 논 미나리의 중간쯤 된다고 볼 수 있다.
수확은 가을과 봄 2차례에 걸쳐 한다. 심는 시기는 비슷하지만 10~12월 수확하는 미나리는 섭씨 0도 저온고에서 20일가량 저온 처리한 다음 심는다. 미나리의 원수확 철은 봄이지만 미나리가 저온고에서 보낸 시간을 겨울로, 밖으로 나오면 봄으로 여겨 가을에도 자란다. 저온 처리하지 않은 미나리는 자연의 섭리대로 겨울을 보낸 다음 2월 초부터 5월 말까지 수확한다. 한재 사람들은 “아무래도 오래 자란 봄 미나리가 제맛이 나기는 한다”고 했다. 미나리가 50~60cm 자랐을 때 수확한다.
◇미나리 먹으려 삼겹살 굽는다
미나리는 대개 매운탕에 넣거나 데쳐서 초고추장 찍어 먹는 숙회로 즐긴다. 하지만 한재 미나리는 생으로 먹는 경우가 많다. 쌈 채소로 훌륭한데, 삼겹살과 환상적 궁합을 자랑한다. 한재에서 오래된 미나리 전문 음식점 중 하나인 ‘탐복미나리가든’ 서상운씨가 미나리 줄기를 한입 크기로 여러 번 접은 다음 잎이 달린 쪽으로 돌돌 말았다.
쪽 찌은 머리 비슷하게 된 미나리에 돼지 삼겹살 한 점을 얹어 쌈장에 찍어 “먹어 보라”고 했다. 아삭한 미나리와 쫄깃하고 고소한 삼겹살이 서로 제 짝을 만난 듯했다. 주인공은 확실히 미나리였다. 삼겹살이 쌈 채소에 밀려 조연이 되다니. 서씨는 “우리는 미나리 먹으려고 삼겹살 굽는다”며 웃었다.
기름진 음식이 대체로 미나리와 궁합이 좋았다. 미나리가 엉길 정도로만 반죽에 버무려 기름에 지글지글 지져 낸 미나리전은 바삭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았다. 서씨는 식당에 나와 아르바이트 하는 고2 아들이 초등학생 때 개발했다는 ‘미나리 김쌈’도 알려줬다. 삼겹살 먹을 때처럼 돌돌 만 미나리를 조미 김에 싸서 먹는다. 미나리 식감을 최대치로 살려주는 탁월한 조합이었다. 삼겹살을 함께 먹어도 좋다.
마무리는 미나리 비빔밥. 잘게 썬 미나리로 뒤덮인 밥에 된장찌개 서너 숟갈 떠 넣고 비벼 입이 찢어져라 욱여 넣었다. 배 부르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건강한 느낌이라면 허풍일까.
코로나 이전에는 이 별미를 맛보러 봄이면 계곡이 미어지게 인파가 몰렸다. 길 따라 농가에서 운영하는 판매장과 식당이 늘어섰다. 판매장에는 대개 시식대가 있어 미나리를 맛볼 수 있다. 미나리 외 음식 판매는 금지돼 있다. 한재 미나리를 삼겹살 등 음식과 제대로 맛보려면 역시 탐복미나리가든(054-371-7755) 같은 식당을 찾는 편이 낫다.
한재 미나리 가격은 판매장에서는 1kg 1만원, 식당에선 1접시 8000원. 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054-373-7688·hjminari.com)이나 윤수업(010-3509-2437) 이장 등 생산자에게 전화하면 택배로 받을 수도 있다. 가격은 판매장과 같으나 배송비가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