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6일)은 정월 대보름입니다. 대보름 먹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묵은 나물이 있습니다. 겨울 전까지 수확해 말린 취나물, 고구마줄기, 시래기, 호박오가리 등 묵은 나물을 물에 불렸다가 삶아 갖은 양념에 맛있게 무칩니다. 시루에 가득 찐 오곡밥과 함께 먹지요.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묵은 나물이 없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비타민 부족으로 떼죽음을 당했을 거란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에는 중요한 식품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대보름에는 반드시 묵은 나물이라야 할까요? “과거엔 정월 대보름에 햇나물이 없었으니 묵은 나물을 먹었지요. 하지만 하우스 등 재배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대보름에도 햇나물을 쉽게 구할 수 있잖아요. 그 맛을 좋아해서라면 몰라도, 묵은 나물을 일부러 찾아 먹어야 할 건강·영양적 이유는 없어요.”
시대가 바뀌어 햇나물이 지천인데 굳이 묵은 나물을 먹을 필요는 없어진 것처럼, 나물을 조리하고 먹는 방법도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죠. 나물은 훌륭한 음식입니다. 하지만 점점 우리 식탁에서 보기 힘들어지고 있죠. ‘손질이 번거롭고 어렵다’ ‘맛내기가 어렵다’ ‘요리법이 한정적이다’ 등의 이유로 나물 조리하길 꺼리는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나물은 노련한 주부들도 제대로 맛 내기 힘든, 한식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손맛’의 최정점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채소 섭취율 1위라는 사실, 아시나요. 우리 밥상의 70%가 채소로 이뤄져 있죠. 이처럼 채소를 많이 먹을 수 있었던 비결은 나물이었습니다. 그런 나물이 점차 밥상에서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식품기업 샘표에서 2년간 나물을 쉽고 맛있고 건강하게 즐기는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를 지난 2019년 ‘봄나물 연구 발표회’에서 공유했습니다. 그 내용을 대보름을 맞아 다시 소개할까 합니다.
◇무쳐 먹지만 말고 볶고 구워서 먹어보자
나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샘표 우리맛연구팀은 ‘나물은 반드시 데치고 무쳐서 먹어야만 하나?’란 의문을 품었습니다. 데치고 끓이는 전통적인 ‘습열’ 조리법 외에 볶기·굽기 등 ‘건열’ 조리법과 갈기·절이기 등 ‘비가열’ 조리법, 전자레인지 등 현대식 조리도구 활용 요리법을 두루 실험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나물이 가지고 있다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맛과 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냉이를 볶았더니 오징어 등 해산물 맛이 확 올라왔습니다. 봄동을 볶거나 굽자 해조류의 감칠맛과 견과류의 고소함이 드러났습니다. 두릅을 볶으니 고기 감칠맛이 났고요. 참취(취나물)을 갈거나 절였더니 아오리 사과향이, 곰취를 갈거나 빻으니 박하·멜론·풋사과향이 풍겼습니다.
이렇게 새로 발견한 맛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물 요리도 개발했습니다. 고수(코리앤더)와 박하 향이 있는 참나물을 활용한 멕시코 살사, 볶은 냉이를 넣은 냉이김밥은 오징어를 넣은 듯 구수한 향과 담백하면서 쌉싸름한 맛이 산뜻했습니다.
◇무조건 파·마늘로 무치지 마세요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속담 다들 아시죠? 차이가 별로 없다는 뜻으로 쓰일 만큼, 나물은 종류와 상관없이 맛이 비슷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물은 놀랄 만큼 서로 풍미가 다릅니다.
우리맛연구팀에서 ‘기체 크로마토그래피 질량분석기(GCMS)’를 이용한 과학적 분석과 식품영양학자의 관능평가를 통해 분석했습니다. 봄나물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 몰랐을 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면서 서로 다른 풍미를 품고 있었습니다. 참나물은 고수, 박하 등 허브와 감귤류의 향을 가지고 있었죠. 가죽나물은 양고기와 액젓에 있는 것과 같은 향 분자를 지녔고, 참두릅은 아스파라거스나 샐러리 향이 숨어있었습니다.
나물은 모두 비슷하다는 인식은 마늘과 파 때문에 생겨난 오해입니다. 마늘과 파의 강한 맛과 향에 나물 고유의 풍미가 묻혀 버리죠. 나물의 개성을 살리려면 마늘과 파를 생각 없이 무조건 사용하는 건 자제하세요. 나물 자체의 맛을 본 다음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 연두 등 어울리는 장류를 선택하세요. 여기에 고소한 맛을 내려면 참기름이나 들기름, 참깨나 들깨, 잣을 더하세요. 새콤한 맛은 식초, 매콤한 맛은 고춧가루로 내면 됩니다.
‘나물은 손맛’이라고 무조건 손으로 세게 무치는 건 금물입니다. 생채는 박박 무치면 조직이 파괴되면서 풋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젓가락을 이용해 아삭한 식감을 유지하도록 가볍게 무칩니다. 숙채는 양념이 나물 조직에 충분히 배도록 손끝으로 강하게 버무립니다.
참기름은 다른 양념으로 무친 뒤 마지막에 넣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패하면서 불쾌한 냄새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으면 나물 본연의 맛과 향을 가릴 수 있으니 적당량만 넣으세요. 식초는 먹기 직전 넣고 버무립니다. 식초의 산 성분이 나물의 엽록소에 작용해 갈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물의 선명한 색을 유지하고 풍미를 상승시키려면 센불에 빨리 볶아냅니다. 곰취·냉이·방풍·씀바귀·원추리·참취 등은 1분30초, 참죽·명이·땅두릅·참두릅은 2분, 비름은 1분이 적당하다는 걸 실험을 통해 찾았습니다. 봄동(3분30초), 머위잎·씀바귀(5분), 머위대(5분30초) 등 질기고 단단한 봄나물은 약한 불에 오래 볶아야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풍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전자레인지로 쉽게 데치기
“나물은 손도 대기 싫다”는 주부들이 많습니다. 뿌리와 줄기, 잎 사이에 낀 흙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씻어서 데쳐내는 밑손질부터 번거롭고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요리사와 영양학자, 식품공학자, 인문학자 30명으로 구성된 샘표 우리맛연구팀에서는 나물의 맛과 영양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쉽게 손질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나물을 다듬을 때는 쿠킹포일을 사용하면 편리합니다. 구긴 쿠킹포일로 나물을 문지르면 뿌리와 잔털, 잎과 줄기 사이 손이 잘 닿지 않는 부분에 낀 이물질을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세척할 때 달래 줄기가 긴 나물은 고무줄을 활용합니다. 줄기 끝부분을 고무줄로 묶으면 한꺼번에 흔들어 세척할 수 있고 나물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세발나물이나 돌나물, 냉이 등 작고 가벼운 나물은 뚜껑이 있는 용기에 물과 함께 담아 흔들면 흙과 이물질을 빠르게 제거할 수 있고 나물이 물러지는 걸 방지할 수 있습니다.
데칠 때는 전자레인지를 이용합니다. 씻고 손질한 나물(100g)을 물(50g)과 함께 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 돌린 뒤 상온에서 식힙니다. 단 쓴맛이 강한 나물은 전자레인지를 이용할 경우 쓴맛이 빠지지 않으니 적합하지 않습니다. 프라이팬을 써도 됩니다.
시판 나물 1팩을 데칠 때는 생수 페트병 하나(2L)가 적당합니다. 나물은 보통 200g 단위로 판매되기 때문에, 데칠 물은 나물의 10배가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페트병 뚜껑으로 하나(6g)면 됩니다. 쓴맛이 강한 나물은 설탕을 조금 넣어도 좋습니다. 나물마다 다르지만, 물이 팔팔 끓을 때 넣고 평균 2분이면 알맞게 데쳐집니다. 흐르는 물에 30초 식히세요. 열을 빼야 나물의 색감과 풍미가 살아납니다. 얼음물은 너무 차가워요. 급속한 온도변화가 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흔히 나물은 손으로 꼭 쥐어서 물기를 짜냅니다. 우리맛연구팀에서는 손으로 나물을 한 덩어리로 뭉쳐 물기를 짜내면 겉은 너무 마르고 속은 너무 축축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대신 김밥 말 때 쓰는 김발을 추천했습니다. 김발에 나물을 펼쳐놓은 다음 적당한 압력으로 말아 꾹꾹 눌러주면 고르고 적당하게 물기가 제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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