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를 다시 땅에 심고 흙을 북돋우면 줄기가 올라와 대파처럼 쑥쑥 자란다. 흙에서 뽑으면 뿌리는 양파 같고 줄기는 대파 같은 희한한 모양이다. 둥그런 겉부분을 제거하면 비로소 대파처럼 곧게 뻗은 뿌리가 드러난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흙 속을 손으로 더듬어 줄기를 잡아 쑥 뽑아 올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파뿌리가 길쭉하지 않고 양파처럼 둥글다. 싱싱하고 멀쩡한 양파도 아니고 물을 머금어 시커멓고 퉁퉁 불었다. 경남 함양군 새롬채소작목반 강호현 작목반장이 다가와 둥근 뿌리를 벗기자 길쭉한 뿌리가 나오더니 대파 모양이 됐다. 대파 같지만 대파는 아니고, 양파 같기도 한 이 희한한 작물은 대체 뭘까. 강 반장은 “이게 바로 ‘함양파’”라며 웃었다.

◇스페인 칼솟에서 아이디어

경남 함양에선 함양파 수확이 한창이다. 함양군이 야심 차게 개발한 신소득 작물. 지난해 처음 재배를 시도해 올해가 두 번째다. 함양군 농업기술센터 황인주 주무관은 “함양파는 정확하게는 양파”라고 했다. 함양파는 생산지인 함양과 파처럼 보이는 양파라는 특징을 두루 살린 절묘한 이름이다.

다 자란 양파를 6월에 수확해 저온 창고에서 3개월 보관했다가 9월 다시 밭에 심는다. 겨울 동안 흙을 3차례에 걸쳐 30~50㎝ 북돋아준다. 그러면 줄기가 양파 하나에서 4개 정도 올라와 대파처럼 쑥쑥 20㎝가량 자란다. 작황을 봐가면서 3~4월에 수확한다.

밭에 심은 함양파는 언뜻 대파처럼 보인다. 대파는 하얀 연백부가 길수록 품질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흙으로 뿌리와 밑줄기를 두둑이 덮어주는 ‘북주기’를 충분히 해주는 이유다. 햇빛을 보지 못하게 해 대파 줄기가 하얗고 부드럽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함양파밭은 일반 대파밭보다 흙이 엄청나게 높이 북돋아져 있었다. 초록색 이파리 끝 한 뼘 정도만 남기고 흙에 파묻혀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양파를 파처럼 키우는 아이디어는 스페인 ‘칼솟(calcot)’에 착안했다. 바르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1~4월이면 파처럼 재배한 양파 ‘칼솟'을 먹는 ‘칼소타다(calcotada)’가 대유행이다. 20세기 초 바르셀로나 인근 시골의 한 농부가 처음 재배에 성공했다니 스페인에서도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흙을 북돋아 양파를 대파처럼 만든 칼솟은 줄기가 연하면서도 달다. 카탈루냐에서는 전통적으로 칼솟을, 봄을 앞두고 가지치기한 포도나무에서 나온 잔가지를 모아 피운 불에 굽는다. 겉이 시커멓게 타도록 구운 칼솟은 신문지로 감싸 30분가량 둔다. 그러면 잔열로 안까지 부드럽게 쪄진다.

함양파는 스페인 칼솟처럼 겉을 태우듯 구운 다음 벗겨내고 흰 속살을 먹는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제 칼솟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까맣게 탄 껍질을 벗겨내면 하얀 줄기가 드러난다. 알맞게 익어 부드럽고 달큼한 칼솟은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대개 구운 토마토와 구운 마늘, 아몬드·잣·헤이즐넛 등 견과류, 올리브오일 등 식용유를 섞어 곱게 간 로메스코(romesco) 소스에 찍어 먹는다. 이렇게 칼솟과 다른 구운 채소를 먹은 다음 양·돼지·소고기·소시지 등을 구워 와인과 함께 즐기는 게 칼소타다다.

칼소타다는 카탈루냐 사람들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빠지지 않고 즐기는 미식 행사가 됐다. 강호현 작목반장은 “스페인에 다녀온 한국인이 급증하면서 칼솟이 국내에도 꽤 널리 알려졌다”며 “그렇다면 칼솟처럼 구워 먹는 양파를 개발해보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 작목반에서 시험 삼아 재배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요즘은 캠핑족이 늘어나, 캠핑장에서 불 피워 놓고 구워 먹으면 재미도 맛도 있어서 인기를 얻지 않을까 예상했지요.”

◇가격 폭등한 대파 대안은 안 되나

함양파밭 앞을 지나던 한 주민이 “마트에서 대파라고 팔면 잘 사겠는데”라며 웃었다. ‘금(金)파’ ‘대파 대란’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폭등했던 대파 가격이 지난달보다는 많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고공비행 중이다. aT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지난 16일 소매시장에서 대파 1㎏(상품)은 6291원에 거래됐다. 대파값이 고점을 찍은 3월 중순보다는 1000원가량 내렸지만 여전히 평년 가격(2592원)의 2.5배 수준이다. 지난 18일에는 부산 해운대구 도시농업공동체에서 파 모종 나눔 행사를 열고 집에서 파 기르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오른쪽은 갓 수확한 함양파, 왼쪽은 둥근 겉부분을 벗겨내 대파처럼 보이는 함양파./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처럼 파값이 쉽게 잡히지 않으면서 함양파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실제로는 양파지만 겉보기엔 영락없는 대파인 함양파를 파 대신 쓸 수 있지 않겠냐는 것. 강 작목반장은 “함양파가 파를 대체하긴 어려울 듯하다”고 했다.

“일단 가격이 파보다 크게 싸질 않아요. 함양파가 대형마트 등에서 600~700g 한 팩에 5000~6000원에 팔리고 있거든요. 게다가 함양파는 파보다 훨씬 섬유질이 적어 부드럽습니다. 파처럼 먹을 수는 있을 겁니다. 소비자들은 달콤한 대파 정도로만 알 거예요. 하지만 삶거나 하면 금세 흐물흐물해져요.”

함양파 몇 뿌리를 받아서 서울 집으로 가져왔다. 파처럼 동그랗게 송송 썰어서 고깃국에 넣어봤다. 조금 약하지만 영락없는 파 냄새가 올라왔다. 숟가락으로 함양파를 국에서 건져 입에 넣고 씹어봤다. 끓는 국물에서도 단단함을 유지하는 파와 달리, 함양파는 곧 분해되기라도 할 듯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파처럼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는 점이 함양파의 장점이지만, 대파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건 아쉬웠다.

◇구워도 부쳐도 절여도 맛있다

함양군에서는 일단 함양파를 도시 소비자들에게 스페인 칼솟처럼 먹도록 홍보·판매하고 있다. 에어프라이어 온도를 섭씨 180도로 맞추고 15분 돌리면 겉이 갈색으로 익는다. 겉껍질을 벗기면 흰 속살이 나온다. 허니 머스터드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균일하게 쪽 뻗은, 대파처럼 생긴 함양파를 높이 쳐준다. 강 작목반장은 “굵기가 균일해야 고루 익는다”고 했다.

함양군에서는 함양파를 이용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요리를 개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황인주 주무관은 “함양파를 파전처럼 부치면 대파로 했을 때보다 더 맛있다”며 “일반 파로 부쳤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다”고 했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 김치 양념에 버무린 ‘함양파 김치’는 전남 무안에서 즐겨 먹는 양파 김치처럼 달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좋다.

10분가량 찜기에 익혀 청양고추를 곁들인 간장 소스를 부은 ‘함양파 간장찜’, 미나리·당근 등 여러 채소와 오징어를 넣고 초고추장에 무친 ‘함양파 초무침’, 간장·식초·설탕 섞은 물에 재운 ‘함양파 장아찌’ 등이 함양군에서 지금까지 개발한 함양파 음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