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데이트할 때 가는 거리라고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경리단길과 그 파생상품인 망리단길(망원동+경리단길), 송리단길(송파+경리단길)에는 ‘아재 입맛’ 소유자에게도 한 줄기 오아시스가 되어줄 맛집이 있다. 골목길 인기에 따라 명멸하던 일본 라멘, 마카롱, 수제버거 등 트렌드 식당이 아니다. 중장년 미식가들과 젊은이들까지 굴복시킨 전통의 맛집들이다.
서울 이태원동 국군재정관리단(구 육군중앙경리단) 인근 ‘여수댁’. 이 집에서 여수 직송 덕자(길이가 30㎝ 이상인 대물 병어)를 마주하면 그동안 먹었던 병어는 잔챙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이태원에서 여수 밤바다를 펼쳐내는 집. 경리단길 초입 이태원 제일시장 안에 있는데, 이 자리에서 반찬가게를 하던 주인이 6년 전 차린 생선찜·구이 전문점이다. 안주인이 여수 출신이라 친인척을 통해 받아오는 덕자·민어·가오리찜이 유명한데 찜을 시키면 여수 간장 돌게장, 돌산 갓김치, 구운 여수산 돌김이 반찬으로 나온다.
생물 가오리찜(4만~4만5000원)과 반건조 민어찜(4만~5만원)도 유명하지만 이 집에서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덕자찜을 먹어야 한다. 무게는 1.5㎏, 길이는 40㎝쯤 되는 덕자에 칼집을 넣고 찜기에 30분 쪄서 대파와 홍고추를 올려 낸다. 살은 한없이 부드럽고 담백하지만 밍밍하지는 않다. 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양념에 기대는 조림과 달리 잔재주 없는 생선 자체 맛이다. 뺄 것은 다 뺀 모더니즘의 간결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듯한 음식이다. 병어는 어느 철에 먹든 맛있는 생선으로 꼽힌다. 한 마리에 11만~12만원(시가) 선이라 만만한 값은 아니지만, 성인 남성 3명이 먹을 수 있고 각종 여수산 반찬까지 풍성하게 내주다 보니 수긍할 수 있다. 반듯하게 생긴 물고기 한 마리를 바라보며 얻는 시각적 만족감은 덤이다. 거대한 덕자를 통째로 받아볼 때 찾아오는 기쁨은 오늘 하루도 밥벌이에 성공한 수렵시대 가장(家長)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안긴다.
여수에서 받아오는 돌게장도 인기. 주인 원호명(59)씨는 지난 20일 “코로나 이전에는 연예인 이동욱·조세호씨가 새벽에 간장게장정식(9000원)을 먹으러 자주 왔다”고 했다.
서울 망원 ‘용머리 감자탕’은 옥호와 달리 인근 주민과 출판사 직원 사이에서 닭볶음탕(3만7000원)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닭고기⋅감자⋅양파⋅당근 등 재료만 보면 뻔할 수도 있는 구성. 그러나 닭볶음탕(닭도리탕)이 갈수록 달아지는 추세에 저항하는 집이라는 점에서 반갑다. 단맛을 절제한 국물에서는 매콤한 맛이 올라온다. 15년 이상 이곳에서 영업했다고 한다.
서울 송파 송리단길 인근 ‘전라도집’은 청국장(7000원)이 맛있는 백반집이다. 신김치와 두부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청국장은 파스타, 일본 라멘, 도넛 등 디저트 가게가 즐비한 송리단길에서 토속적인 맛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