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래동 ‘솥돈’에서 뒤집힌 솥뚜껑에 고기와 김치를 굽는 모습. 우묵 파인 곳으로 모인 돼지기름에 포기김치를 지져 먹는다.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되풀이되는 역사처럼 솥뚜껑의 인기도 반복되는가. 한 번은 바로 놓인 채로, 다른 한 번은 뒤집힌 채로.

1990년대 인기를 누렸던 솥뚜껑이 다시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솥뚜껑이 뒤집혔다는 것이 차이다. 몇 년 전이면 ‘기름 안 빠지게 뚜껑을 뒤집은 채로 구우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들었을 방식이다. 하지만 이제는 삼겹살·차돌박이 등 기름진 고기 부위에서 나온 기름을 김치·미나리 등 다른 부재료에 맛을 입히는 데 활용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 문래동 ‘솥돈’은 1990년대 솥뚜껑 삼겹살의 진화 형태다. 먼저 뒤집힌 솥뚜껑 가장자리에 10일가량 숙성한 삼겹살을 굽는다. 돼지기름이 지글거리며 우묵하게 파인 가운데 부분으로 모여든다. 기름 위에 전라도식으로 담가 새콤하게 익은 포기김치를 올린다. 김치의 수분과 돼지기름이 만나 ‘치익’ 하며 예약된 소리를 냈다. 돼지기름으로 튀기듯 구운 김치는 신맛과 고소한 맛이 균형을 이뤘다. 기름이 쪽 빠진 삼겹살과, 그 기름을 담뿍 머금은 신김치. 한국인이라면 참기 어려운 그 맛이 더 고소하게 펼쳐졌다.

문래동 '솥돈'의 김치칼국수. 고기를 구워먹은 솥뚜껑에 김치와 육수를 넣고 칼국수를 끓여낸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렇게 고기와 김치를 먹고 나면 바로 그 솥에 김치칼국수를 끓여 먹는다. 고기를 구울 때 팬에 달라붙는 맛 성분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김치·김치칼국수 모두 신맛을 깔고 가다 보니 느끼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솥돈 관계자는 “문을 연 지 1년 됐는데, 돼지기름에 굽는 김치가 특히 반응이 좋다”고 했다. 제주·부산 등에도 이렇게 솥뚜껑을 뒤집어 굽는 집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들어서고 있다.

차돌박이, 조개 관자, 미나리, 고사리, 계란찜이 어우러진 ‘한미옥’의 솥뚜껑 차돌 구절판. /한미옥 인스타그램

서울 강남 논현동 ‘한미옥’은 뒤집힌 솥뚜껑에 구워내는 차돌구절판이 인기 메뉴다. 차돌박이를 구우면서 나온 기름에 조개 관자, 미나리, 고사리 따위를 구워 구절판처럼 펼쳐낸다. 가운데에는 계란 물을 부어 계란찜을 만든다. 차돌구절판을 먹고 나면 남은 고기 기름을 활용해 된장죽을 끓여낸다.

이용재 음식평론가는 “‘기름 쫙 뺀 고기’를 좋아하던 한국에서 고기 기름을 활용한 조리 문법이 갖춰지는 양상”이라며 “특히 김치에 있는 고춧가루는 기름과 만났을 때 맛이 활성화돼 과학적인 조리법”이라고 했다. 베이컨을 지질 때 나온 지방을 활용해 끓이는 클램차우더(조개 수프)처럼 각종 스튜·수프에 육류 지방을 활용하는 서양식 조리 문법이 한식에 적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단(저탄고지)이 유행하면서 지방에 대한 인식이 관대해진 것도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 ‘지방을 먹으면 살찐다’가 아니라 ‘설탕 등 탄수화물을 먹으면 살찐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지방 좀 먹어도 괜찮다는 인식이 전보다 보편화되는 추세다.

집에서는 흔히 ‘그리들’이라고 부르는 캠핑용 불판을 활용하면 솥뚜껑을 뒤집어 굽는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다만 기름과 수분이 만나면 유증기(油烝氣)가 발생하고 기름도 사방으로 튀니, 뒷정리를 할 사람에게 등짝 맞을 각오를 하고 도전하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