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이 덜 됐어요. 이러면 실링(sealing·밀봉)이 풀리면서 비닐팩이 열려요. 다시 하세요.” “이건 비뚤어지고 쭈글쭈글하네요. 이렇게 돼도 금방 실링이 풀려요. 실링기 열선에 비닐팩 윗부분을 일직선으로 통과시켜야죠. 다시 하세요.” 친절하던 이혜영 주임 목소리가 점점 딱딱해졌다. 처음 작업 체험에 나선 기자 때문에 전체 생산이 지체될 걸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15일 부산 기장에 있는 밀키트 전문 기업 ‘푸드어셈블’ 공장에선 ‘야채 전처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야채 전처리란 밀키트에 들어갈 각종 채소를 씻고 자르고 소분해 담는 작업. 푸드어셈블 대표 제품 중 하나인 ‘채선당 밀푀유나베 밀키트’에 들어갈 배추를 잘라서 비닐팩에 담아 진공 포장하는 작업을 이 주임 지시에 따라 해봤다. 겉잎을 떼어낸 배추속대를 반으로 잘라 규격에 맞춰 300g씩 비닐팩에 담는다.
“300g이 조금 넘어도 되지만 모자라선 절대 안 돼요.” 이 주임은 ‘인간 저울’이었다. 그냥 집어도 정확히 300g씩 덜어졌다. 반면 기자는 집었다 덜었다가 더하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300g에 맞출 수 있었다. 비닐팩에 배추를 담기도 의외로 힘들었다. 배춧잎이 생각보다 뻑뻑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밀봉 작업이 특히 까다로웠다. 이 주임에게 “이건 나갈 수 없다”며 퇴짜 맞는 경우가 통과보다 많았다. 그는 “바쁜 날은 이 작업을 500개 이상 해야 한다”고 했다.
◇식당 뺨치는 ‘맛집 키트’
밀키트(meal kit)는 손질된 음식 재료가 양념, 레시피(요리법)와 함께 들어 있는 제품을 말한다. ‘RTP(Ready To Prepare)’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순한 조리 과정을 거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의 한 종류다.
간편식은 필요한 조리 정도에 따라 ‘즉석섭취식품’ ‘즉석조리식품’ ‘즉석반조리식품’ ‘밀키트’ 등으로 분류한다. 즉석섭취식품은 도시락·샌드위치·김밥·샐러드 등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 즉석조리식품은 즉석 밥·레토르트 등 전자레인지나 뜨거운 물에 데워 먹는 음식, 즉석반조리식품은 냉동 만두·돈가스·볶음밥 등 간단한 조리 과정을 거치면 섭취 가능한 음식이다.
푸드어셈블은 ‘RMR(Restaurant Meal Replacement)’ 개념의 밀키트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 업체 중 하나다. ‘채선당 밀푀유나베’ ‘기승전골 곱창전골’ ‘을지다락 매콤크림파스타’ ‘짐승파스타 월터감바스’ 등 이름난 맛집과 협업해 개발한 ‘맛집 키트’로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 2017년 창업 당시 월평균 1만개에서 5년 만인 올해 월평균 80만개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hy(한국야쿠르트) 온라인몰 ‘프레딧’ 판매 밀키트 대부분이 푸드어셈블에서 생산된다. 부산 기업이란 지역색을 살려 지난해 에어부산, 대선주조(C1 소주)와 함께 출시한 돼지국밥 밀키트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밀키트는 제품 특성상 미리 만들어 둘 수 없다. 마케팅 담당 박시연 주임은 “밀키트는 일종의 신선 식품이라 유통기한이 7일밖에 되지 않는다”며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생산을 시작한다”고 했다.
밀키트 생산의 첫 단계는 ‘자재 발주 및 입고’. 이어 흙과 이물질 등을 털어내고 깨끗하게 세척하는 ‘전전처리’ 단계를 거친다. 1차 소독·2차 헹굼·3차 헹굼 등 3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직원들이 장갑·모자·작업복을 착용하고 자외선 소독·에어샤워 등 위생 과정을 거친 뒤에야 공장 작업장에 들어가는 건 물론이다.
전전처리를 마친 재료들은 전처리 과정에 들어간다. 박 주임은 “각 음식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가능한 개별 포장하는 게 우리 제품의 특징”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재료가 제각각인데, 개별 포장하면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마늘·양파 등 향이 강한 재료는 다른 재료에 냄새가 밸 수 있는데 이를 방지할 수도 있고요. 인건비와 포장재 비용이 더 들지만요.”
포장 방법은 재료마다 다르다. 감자, 양파 등 단단한 재료는 진공 포장한다. 숙주, 깻잎처럼 금세 물이 생기는 재료는 미세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특수 필름 포장재에 담는다. 채소는 대부분 냉장 포장하지만, 소고기 같은 육류나 새우 같은 해산물은 냉동 포장한다. 얼려도 식감이 유지되는 데다 신선도가 더 오래 유지되기 때문이다.
밀키트에 들어갈 모든 재료가 포장돼 모이면 ‘제품 조립’이 이뤄진다. 각 제품에 들어갈 재료들을 차곡차곡 케이스와 배달용 상자에 담는다. “케이스와 배달 박스를 계속해서 바꿔가고 있어요. 플라스틱 케이스는 배송 중 깨질 수 있는데다, 환경 오염 우려도 있으니까요. 배달 상자도 스티로폼에서 친환경 2겹 종이 보랭 박스로 교체 중입니다.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레시피도 별도 인쇄한 카드를 넣어주는 방식에서 아예 케이스에 인쇄하고 있어요.”
◇”코로나 끝나도 계속 성장할 것”
농림축산식품부와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간한 ‘2021 국내외 외식 트렌드’에 따르면, 국내 간편식 시장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 3조5000억원 대비 2020년 4조3000억원으로 22.9%, 2021년 5조원으로 42.9% 늘어나는 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RMR과 외식업소 밀키트 상품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대부분의 외식 전문가들은 코로나가 끝나도 밀키트를 포함한 간편식의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박 주임은 “소비자들이 밀키트를 포함한 간편식에 익숙해진 데다, 식당들도 ‘밀키트 OEM 생산을 상담하고 싶다’며 연락해오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