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 서교동에 있는 중식당 ‘진진(津津)’ 왕육성(68) 대표는 국내 중식 조리사들에게 ‘사부(師父)’라 불린다. 왕 대표는 “중식 쪽에서는 총주방장을 사부라고 한다. 특별하지 않다”며 대수롭잖아 했지만, 이연복 셰프는 “항상 가르침을 주는 형님이자 인생의 스승”이라며 “중화요리계의 BTS”라고 했다.
왕 사부의 이력도 독특하다. 1972년 중식당 잡부로 출발한 그는 특급 호텔 중식당 총주방장에 이어 오너 셰프가 되면서 조리사로서 최정점에 올랐다. 환갑을 앞두고 잘되던 식당을 후배에게 넘기고 은퇴하나 싶더니, “왕육성이 망했나 봐”란 소리까지 들으며 서교동 외진 구석에 중식당 ‘진진’을 차렸다. 짜장면도 짬뽕도 팔지 않는 이 희한한 중식당은 오픈 40일 만에 만석(滿席)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세계적 레스토랑 평가서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 1개를 받아 화제가 됐다.
왕 사부가 ‘진진 왕육성입니다’(동아시아)를 최근 펴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왕 사부 개인의 조리 이력과 한국 화교·중식 역사를 촘촘하게 엮은 책이다. 진진 분점 ‘서교동진향’에서 그를 만났다. 왕 사부는 자신이 진진에서 ‘퇴출’시켰던 짜장면에 소스로 쓸 춘장을 열심히 볶고 있었다. 그는 “치킨만 한식을 대표하는 메뉴가 되란 법 있느냐”며 “’서교동에서 세계로’란 모토로 짜장면을 연구·개발하고 있다”며 웃었다.
◇짜장면·단무지 없는 중식당
-짜장면이 한국 음식인가.
“중국에서 건너왔지만 이제는 중국보다 한국에서 훨씬 많이 먹고, 더 맛있다. 한국화된 짜장면은 이제 중국 짜장면과 전혀 다른 음식이다. 미국 사람들이 치킨을 한국 음식으로 여기듯, 중국 사람들도 짜장면을 한식으로 안다.”
-진진에선 왜 짜장면을 뺐나.
“진진 콘셉트를 ‘동네에서 부담 없는 가격에 즐기는 호텔 중식’으로 잡았다. 짜장면과 짬뽕 등 값싼 메뉴만 파는 동네 중국집이 되는 게 싫었다. 단무지와 양파를 내지 않고, 군만두 서비스를 없앤 것도 같은 이유다.”
-근데 왜 짜장면을 다시 연구하나.
“박찬일 셰프가 쓴 책(짜장면: 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을 읽었다. 짜장면이 이토록 중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짜장면 공부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진 본점에서는 여전히 팔지 않지만 서교동진향에서 춘장, 면 등 여러 요소들을 연구하면서 점심에만 조금씩 팔고 있다.”
-호텔 중식당을 그만두고 작은 중식당을 연 까닭은 뭔가.
“2년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놀기도 쉽지 않더라(웃음). 친구들이 있어도 처지가 서로 다르니 함께하기 힘들더라. 혼자서도 잘 노는 방법을 배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음식은 호텔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가격은 동네 식당 수준으로 낮춘 비결은.
“권리금 없는 자리에 시설 투자를 많이 하지 않고 1층에 40~50석 규모 가게를 열기로 했다.”
-진진 본점 자리는 사무실이나 아파트 단지도 없고 지하철역도 먼, 좋은 상권이라고 할 수 없는데.
“오래 알고 지낸 요리사가 찾아왔다. 앞에선 내색 안 했지만 돌아가서 울었단다. ‘형편이 얼마나 좋지 않길래 이런 가게를 냈느냐고 생각했단다(웃음).”
-불안하진 않았나.
“과거 음식 장사는 상권과 인맥으로 하는 지상전이었다. 지금은 공중전 시대다. 일부러 찾아올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진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면 사람들이 자진해 소문 내 주리라 판단했다.”
-그 특별한 무엇이 멘보샤(麵包蝦)였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청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화교가 운영하는 중식당이 줄어들며 고급 중국 요리는 호텔에나 가야 먹을 수 있게 됐다. 잊혀져 가는 요리를 살려내 진진의 대표 이미지로 만들고자 했다. 멘보샤, 대게살볶음, 카이란소고기볶음, 오향냉채 등 10여 가지 메뉴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빵 사이에 다진 새우살을 넣어 튀긴 멘보샤는 진진 대표 메뉴 중 하나다. 새우살이 속까지 익도록 섭씨 130도에서 익히다가 온도를 180도까지 올려가며 튀겨내야 느끼하지 않고 바삭한, 까다로운 음식이다. 진진 덕분에 유명해지면서 멘보샤는 이제 웬만한 중국집은 물론 치킨집, 심지어 HMR 제품으로 출시되기까지 했다.
진진은 주방 가동 40일 만에 만석이 됐다. 박찬일 셰프는 왕 사부의 책 추천사에서 “진진은 파격”이라고 했다. “진진은 순 거꾸로 가는 중국집이다. 남이 안 하는 것을 하고, 나른한 고정관념을 깨고, 손님들이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려고 했다. 그리고 성공시켰다. 그는 늘 다정하게 웃지만 무서운(!) 사람이다.”
진진은 오픈 1년 만에 스타 레스토랑에 등극한다. 미쉐린으로부터 별 1~3개를 받은 서울의 식당은 24곳. 중식당은 5성급 호텔 포시즌스의 ‘유유안’과 진진 2곳뿐이다.
-미쉐린은 너무 서구 중심이라는 비평도 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른 음식을 자신들 기준으로 점수 매긴다고 비판받는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진진 요리가 서구 미식 기준에도 맞고, 세계인의 보편적 입맛에 그만큼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박 나려면 무조건 웃어라
왕 사부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3세 때 서울 화교중고등학교로 유학 올 때까지 중국 톈진 출신 주물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전북 전주, 대전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살았다. 왕 사부는 “당시에는 국내 주물공장을 거의 다 화교들이 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조회시간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월사금 아직도 안 낸 놈 있지? 손 들어 봐’라고 했다. 학생들 집안 사정을 뻔히 알고 누가 내고 안 냈는지 알면서 망신 주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모가 사는 대전이 아니라 충주 외삼촌을 찾아갔다.
“삼촌이 ‘청평관’이란 중식당을 운영했다. 충주에는 비료공장이 있어서 장사가 잘됐다.”
-청평관에서 일하지 않고 화교가 운영하는 ‘영풍상회’에 취직했다.
“식자재와 직물, 잡화를 취급하는 큰 도매점이었다. 창고가 다섯 개나 됐다.”
-영풍상회에서 장사의 기본을 배웠다고.
“주인 할아버지가 ‘장사꾼은 항상 웃어야 한다’고 했다. 손님을 보면 무조건 먼저 한 번 웃고 이야기를 시작해라. 그래야 내 말이 손님 귀에 들어간다고 했다.”
-일 잘한다고 인정받았는데 1년 만에 그만뒀다.
“한국 경제는 점점 성장하는데, 가게에서 취급하는 물건이나 판매 방식은 구식이었다. 한계가 보였다.”
왕 사부는 1972년 서울에 다시 올라와 ‘대성원’에 취직했다. 산둥성 출신 어머니와 같은 마을에 살던 이웃이 하던 중식당이었다. 주방에서 음식을 내오고, 계산하고, 배달도 했다.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도 익혔다. 이듬해, 도와달라는 매형의 부탁에 뚝섬 ‘성수원’으로 옮겼다.
성수원에서 왕 사부는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뚝섬에 있던 경마장 경비과장에게 고급 요리에 고량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아 배달금지구역인 관람석을 뚫었다. 짜장면과 단무지 5쪽, 나무젓가락으로 쉽게 먹고 치울 수 있도록 ‘세트’를 만들어 매출을 크게 늘렸다. 모나미 볼펜 공장 총무과장을 설득해 공장 직원들이 근처 함바집 대신 배달시켜 먹도록 하고 월급날 일괄 수금했다. 삼표산업 레미콘 공장도 거래를 터서 삼발이차에 짜장면을 싣고 낮이고 밤이고 들어갔다.
기왕 식당에 발 들여놓았으니 일류 식당에서 요리사로 인정받고 싶었다. 1974년 종로구 관수동에 있던 ‘대관원’에 들어갔다. 이후 대우빌딩 ‘홍보석’, 신촌 ‘만다린’, 명동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 등 내로라하는 중식당에서 일하며 수련했다. 28세에 플라자 호텔 ‘도원’ 칼판장으로 입사했고, 32세이던 1986년 코리아나호텔 대상해 총주방장이 됐다.
-이연복 셰프는 호화대반점에서 만났다고.
“입사했을 때 떠난 상태였지만 친구들을 보러 자주 놀러 왔다. 지금은 후덕한 아저씨 모습이지만 그때는 깡말랐고 눈이 빛나는 청년이었다. 막내로 들어가 2년 만에 칼판 서열 2위에 오를 만큼 일찌감치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대상해 총주방장 취임 1년 만에 매출을 10배 올린 비결은.
“특급호텔에서 10만원 받던 상어지느러미(샥스핀) 요리를 4만원에 냈다. 원가 수준이었지만 생각보다 값이 싸면 손님들이 다른 요리를 추가 주문하고, 요리는 술을 부르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 30만~40만원이던 매상이 300만~400만원을 찍는 날도 있었다.”
-1997년 오너셰프가 됐다.
“호텔 측이 한·중·일 식당을 직영에서 임대로 전환하기로 했다. 사장이 중식당을 맡아 달라 제안했다.”
-하필 IMF 사태가 터진 해였다.
“간단한 요리 2~3가지에 식사가 나오는 비즈니스 코스를 만들었다. 오히려 수익이 늘었다.”
-어떻게 해야 매상을 많이 올리나.
“‘간객하채접(看客下菜碟)’. 손님을 보고 요리를 권하라는 말이다. 볶음밥 먹으러 왔는데 팔보채 권하면 기분 나쁘고, 반대로 금샤오롱 먹으러 왔는데 짜장면 권하면 자존심 상한다. 나는 손님이 가게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어떤 분인지 안다. 허름한 사람이라도 내면이 충만하면 여유가 배어 나온다. 걸음걸이, 자세, 목소리, 눈빛에 지성의 정도가 담겨 있다. 내가 돗자리 깔아도 된다(웃음).”
-딱 보면 흥할 집, 망할 집 판단이 서나.
“문앞이 지저분하거나, 손님이 없거나, 규모에 비해 메뉴가 지나치게 많은 식당은 들어가지 않는다. 정말 장사 잘되는 식당은 주인이 바쁘지 않고 종업원들이 많아 여유가 있다.”
-어떻게 해야 식당이 성공하나.
“이것만 지키면 성공보다 실패가 어렵다. (1)사람이 먼저다. 직원을 존중하면 그들이 손님을 존중해준다. (2)만약을 대비하라. 교토유삼굴(狡兎有三窟), 영리한 토끼는 굴 3개를 파놓는다.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라는 뜻이다. (3)신용이 생명이다 (4)무조건 웃어라 (5)그리고 기다려라. 쉬워 보이지만 행동에 옮기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