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고 평평한 냄비가 올라왔다. 직원이 물었다. “어복쟁반 맞죠?” 동의를 알리는 끄덕임에 직원은 빠르게 가스불을 켜며 말했다. “다 익은 거니까 끓기 시작하면 드세요.” 냄비 중앙에는 간장 양념장이 놓였다. 그 주변으로 채소가 수북이 쌓였고 밑으로는 고기가 깔렸다. 맞은편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가 앉았다. 8년 전 각자 다른 회사의 명함을 들고 현장에서 만났다. 밤에 전화하다 잠들었고 새벽에 눈 뜨면 문자가 와 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녀야만 마음이 통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제일 크게 도움을 받았다.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짧은 점심 시간, 뛰어가 도착한 곳은 서울 삼성동 ‘경평면옥’이었다. 2층에 있는 이 집에 들어서니 훤히 밝혀진 주방부터 눈에 들어왔다. 더럽거나 어지러운 구석이 없었다. 홀 가장 안쪽에 그가 앉아 있었다. 밤을 새워도 몸에 힘이 돌던 시절은 갔다. 자주 피곤하고 또 그만큼 책임져야 할 것도 많다. 그럼에도 선한 눈빛과 정중한 목소리는 변함없었다.
어복쟁반은 조금씩 끓어 올랐다. 온기를 얻은 고기부터 먹기 시작했다. 어복쟁반의 ‘어복’이 실은 소 뱃살을 뜻하는 우복(牛腹)의 잘못된 발음이란 설이 있다. 그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은 것이 어복쟁반에 주로 쓰는 부위 중 하나가 소 앞가슴부터 배 아래쪽까지의 살코기를 일컫는 양지다. 기름이 살짝 낀 소고기는 오래 익혀 부드러웠다. 육수를 뽑고 남은 고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복쟁반용으로 따로 삶는 듯싶었다. 육수를 추가해 메밀면을 말았다. 냉면으로 먹을 때는 짱짱하던 면발이 부들부들해졌다.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없었다. 모든 것이 순하고 유했다.
연희동으로 가면 ‘우주옥’이 있다. 마장동에서 일했고 서양요리를 오래 했다는 주인장이 홀로 가게를 지켰다. ㄷ자 모양 바 카운터 안쪽으로 주방이 있다. 주인장은 안팎을 오가며 주문을 받고 또 요리를 했다. 저녁에만 문 여는 이 집 손님은 술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둘이 짝지어 나란히 앉은 뒤 주문하는 것은 백이면 백 어복쟁반이었다. 고기가 켜켜이 쌓여 나온 어복쟁반은 작은 사이즈가 있어서 남녀 둘이 먹기에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우설, 양지 등 부위도 다양했다.
필수로 술을 주문해야 하는데, 이는 매출보다 오히려 이 집 음식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을 손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란 생각도 들었다. 영양부추를 곁들인 매콤한 내장무침은 식당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단맛이 아예 없어서 고기 맛이 집중력 있게 느껴졌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전통을 살려 마무리로 냉면을 청하는 이가 또 다수였다. 냉면은 육수의 농도에 따라 ‘청’과 ‘진’으로 나눴다.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육수의 잔향에 홀로 이 집을 이끌어나가는 주인장의 강단이 묻어 나는 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경기도 일산에 가면 얼마 전 합정동에서 자리를 옮긴 ‘동무밥상’이 있다. 북한 옥류관 출신 사연 많은 주인장이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이 집은 험난한 세월을 견뎌낸 노(老)주방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 비해 훨씬 넓고 쾌적해진 식당에 앉으니 주인 내외가 겪은 시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찬으로 나온 콩나물 김치에서 신맛을 자유자재로 쓰는 내공을 목도할 수 있었다. ‘콩나물이 쉰 것 아니냐’며 항의하기도 한다지만, 아삭하고 개운한 신맛의 아슬아슬한 쾌감은 여느 곳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부류였다. 납작하게 썬 소고기와 오이를 식초에 버무린 ‘소고기초무침’도 일타 강사의 명쾌한 문제 풀이처럼 맛에 막힘이 없었다.
거대한 놋 냄비에 올려진 ‘어복쟁반’은 위에 채 친 파가 한가득이었다. 불을 올려 이 파를 국물에 서서히 익혀갔다. 채소 속에 파묻힌 고기를 조금씩 건져 먹었다. 육수가 끓어올라 농도가 짙어졌다. 당면을 익혀 건져 먹고 남은 국물에는 면사리를 청해 풀어 넣었다. 육수를 머금어 하늘거리는 면을 먹은 다음 코로 숨을 내쉬고 들이쉬었다. 구수한 메밀의 향취와 육수의 감칠맛 어린 단맛이 새벽 안개가 공기 중으로 흘러가듯 서로를 느슨히 껴안았다. 국물이 바닥을 보일 즈음에는 어릴 적 시골에 가면 느껴지던 애틋하면서도 정감 어린 맛이 몸에 차분히 스며들었다.
이렇게 순하고 푸짐한 음식을 만나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어릴 적부터 사귀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을 낱낱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면 족하지 않을까? 그날 식사하며 그 마음을 말로 다 내뱉지는 못했다. 대신 고기를 넉넉히 집어 그이 앞에 놓고 말 뿐이었다.
#경평면옥: 어복쟁반 6만5000원(소), 접시만두 1만4000원, 냉면 1만4000원. (0507)1310-6054
#우주옥: 어복쟁반 3만3000원(소), 내장(내포무침) 1만7000원, 냉면 1만4000원. (0507)1363-4812
#동무밥상: 냉면 1만2000원, 소고기초무침 1만8000원, 어복쟁반 8만원. (031)969-9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