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럼 더 코닝(1904~1997)은 20세기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과격하고 복잡한 붓 터치 화법으로 여성을 악마적 성적 대상으로 묘사한 〈여인·그림1〉 연작이 유명하다.
그러다 70대가 되며 인지 기능이 감소하면서 화풍이 점차 바뀐다. 1980년대 그린 〈무제·그림2〉 시리즈는 단순하면서 간결한 형태의 그림이다. 그는 그 당시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그 당시 그림에서 치매에서 보이는 특징들이 나타나는데, 몇 개의 단순한 선과 한 가지 색으로 칠한 부분으로 그림이 이뤄졌다”며 “색깔도 전반적으로 파랑과 초록 비율은 줄고 빨간색과 노란색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인지 기능 손상으로 그림이 점차 단순해졌고, 추상표현주의 화가답게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그림에 드러냈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코닝은 치매를 앓았음에도 말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해했다고 한다.
그림은 치매 진단 도구이자 치유 수단이다. 시계 그리기는 손쉬운 치매 진단법이다. 어르신에게 시계가 없는 방에서 시계를 그리게 해보면, 시계 모양이 인지 기능 정도에 따라 다르게 그려진다. 숫자 1부터 12가 제대로 표기됐는지, 숫자 간격은 일정한지, 긴 침과 짧은 침으로 주어진 시각을 정확히 그렸는지 등을 보고 점수를 매긴다. 이 점수는 뇌 영상이나 신경 인지 검사 등으로 한 치매 검사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 단순히 시계를 그릴 수 있다와 없다로 구분하여 치매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도 있다.
치매 환자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미술 치료는 치매 진행을 늦추고 심리적 안정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준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집중력이 높아져 자신감도 되찾는다. 강성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손과 눈의 동작이 조화로워지고 소근육 운동이 활발히 이뤄진다”며 “색채와 형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리는 대상이나 주제를 대해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담아 자발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