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속 장에 있는 세균이 질병 해결사로 등장하고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이야기다. 미생물을 뜻하는 마이크로브(microbe)와 생태계를 뜻하는 바이옴(biome)의 합성어인 마이크로바이옴은 우리 몸속에 사는 미생물 집단을 말한다. 사람 몸속에는 수십조개 이상 미생물이 존재하는데, 80% 이상이 위·대장·소장 같은 장 속에 산다.
이곳에 사는 세균을 추출해 만든 신약이 각종 질병 치료제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포문을 연 건 작년 12월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C. 디피실 감염증 재발 치료제 ‘레비요타’다. 소화기에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증식해 설사·경련을 유발하는 디피실 감염증은 보통 항생제로 치료하지만, 재발률이 높고 항생제 내성이 생기면 치료가 어렵다. 미국에서만 매년 많게는 3만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한다. 레비요타는 건강한 성인의 대변에서 채취한 장내 세균을 정제한 약품으로 환자의 내시경을 통해 환자의 대장 속에 뿌려주면 장내 세균 조성이 유익하게 바뀌어 장염을 낫게 한다. 임상시험에서 레비요타 투약 후 71%에서 8주 이내 증상이 사라졌다.
올해에는 같은 치료 원리의, 입으로 먹는 경구용 치료제도 출시됐다. 지난 4월 말 FDA 허가를 받은 ‘보스트’는 3일간 매일 캡슐 4개만 먹으면 된다. 임상시험에서 가짜 약을 먹은 그룹은 40%가 재발했지만, 보스트 환자군은 재발률이 12%에 그쳤다.
마이크로바이옴은 항암제로도 진화하고 있다. 장내 세균이 암 환자를 살리는 격이다. 국내 바이오 기업 지놈앤컴퍼니는 항암 효과를 높이는 장내 세균주를 추출해 만든 경구용 위암·담도암 항암제를 개발하여 임상시험을 통해 암 환자에게 투여하고 있다. 자신의 면역세포 기능을 키워서 암세포를 죽여서 최근 널리 쓰이는 면역 항암제의 경우, 환자의 장내 세균 조성이 나쁘면 약효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질 좋은 균주를 투입하여 몸속 면역 시스템을 새롭게 자극하면 같이 투여되는 면역 항암제 기능을 크게 올릴 수 있다. 박한수(생화학자) 지놈앤컴퍼니 대표는 “위암에 대한 임상시험 2상이 긍정적인 효과를 보이면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내 세균이 뇌와 연동하여 활동한다는 장-뇌 축(Gut-Brain axis) 이론에 따라 장내 세균으로 초기 치매를 진단하는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 미국 워싱턴대 의대 연구팀은 지난 6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을 통해 아직 인지 장애가 나타나지 않은 치매 초기 환자들의 장내 세균 종류와 생물학적 작용이 정상인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초기 치매를 대변 속 장내 세균 검사로 진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더 나아가 장내 세균 중 유익균을 늘리고 유해균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치매 발생을 지연시키거나 차단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이밖에 비소세포폐암·흑색종 등 전이성 고형암 치료를 위한 임상시험(한국 CJ바이오사이언스), 음식 알레르기(미국 베단타 바이오사이언스), 크론병과 뇌암의 일종인 교모세포종(프랑스 엔터롬 바이오사이언스), 건선·천식·아토피 같은 만성질환(한국 고바이오랩) 등에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가 뛰어들었다. 장내 세균이 난치성 질병 치료 주역이 될 것이라는 평이다. 한편으로 장내 세균의 효용성이 증대되면서, 항생제 남용으로 몸속 장내 세균이 파괴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