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년)은 독일의 위대한 고전 음악 작곡가다. 당시 음악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카페나 강당 같은 대중의 공간으로 나아갔다. 종교적 원리주의에서 과학 기반의 계몽주의로 전환되는 시대와 궤를 같이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교향곡 5번 운명이다. 도입부는 뭔가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분위기다.
시작을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운명이지만, 작곡자 베토벤의 운명은 예상을 벗어난다. 납중독으로 세상을 뜬 줄만 알았던 그의 진짜 사인은 ‘B형 간염’이었던 것이다. 베토벤이 사망한 날, 곁에 있던 친구 작곡가 페르디난드 힐러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했다. 그것이 사인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최근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 공동 연구팀은 이 머리카락을 분석해 사인을 확인했다. 베토벤은 B형 간염 바이러스 유전자와 간 질환에 취약한 변이 유전자를 보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상태에서 베토벤은 간경화로 숨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베토벤이 앓은 B형 간염은 우리나라 국민 100명 중 3명(2.5~3%)이 앓고 있다. 예방 백신이 나오기 전(8~10%)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B형 간염으로 간부전, 간경화, 간암 등 중증 질환을 앓는다.
만성 B형 간염은 대부분 명확한 증상이 없이 조용히 진행돼 증상만으로는 진단할 수 없다. 정기적인 혈액 검사와 간 초음파 검사로 병의 진행 상황을 체크해야 한다. 안상훈 세브란스병원 간내과 교수는 “간 수치가 상승하거나 바이러스 활동이 있으면 간암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항바이러스제로 치료를 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며 “건강보험 적용 기준이 애매한 상황이더라도 적극적으로 치료받는 게 훗날 합병증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간 질환에 취약한 바이러스와 유전자를 가진 줄도 모르고 무엇이 그리 괴로운 것인지, 말년에 과도한 음주를 하다 세상을 떴다. 그것도 운명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