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설가 존 르 카레. /연합뉴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얼마 전 첩보 소설의 대가인 존 르 카레(1931~2020)의 별세 소식을 접한 뒤 문득 생각났던 문구다. 정보 기관의 좌우명인 이 말은 첩보 소설의 주인공들이 처한 운명이기도 하다. 20세기 첩보 소설의 두 대가라고 하면 ’007 시리즈'를 탄생시킨 이언 플레밍(1908~1964)과 존 르 카레가 떠오른다. 둘은 모두 영국 엘리트 출신으로 정보 기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집필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임스 본드가 ‘양지 지향적’인 스파이라면, 존 르 카레의 소설에는 ‘음지형’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첩보 소설은 미소 냉전 시기의 산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20세기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국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처럼 냉전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첩보물은 쏟아진다. 존 르 카레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이 장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추모의 방법일 듯하다.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1)’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1965년)

“요원들은 항공편이 아니오. 스케줄이란 게 없으니까.”

영화 초반의 대사처럼 첩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따위는 없다. 퇴근도, 회식도, 휴가도 없이 오로지 작전에 매몰된 워커홀릭(일벌레)들로 가득하다는 점이야말로 첩보 영화의 기묘한 특징이다. 존 르 카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1963년 출세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영화화한 작품.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로 행세하는 영국 스파이 알렉 리마스 역을 리처드 버튼이 맡았다.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은 그 어떤 감상이나 연민도 없이 비정하고 타락한 냉전 질서 속에 등장 인물들을 던져 놓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하드보일드의 확장판이다. 영화에서도 리마스는 스스럼없이 말한다. “스파이는 나처럼 지저분하고 추잡한 무리일 뿐이야. 하찮은 주정뱅이와 별종, 공처가와 공무원이지. 썩어빠진 인생을 서부극 놀이로 빛내려 하지.” 1950~1960년대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동서 베를린을 배경으로 간계와 반간계가 어우러진 스파이물의 고전적 공식을 보여주는 흑백 영화의 걸작이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

2)영화 ‘테일러 오브 파나마’(2001년)

도박 빚과 여성 편력으로 물의를 빚던 영국 첩보원 앤디(피어스 브로스넌)는 파나마로 발령 받는다. 좌천이라고 생각했지만, 1999년 파나마 운하의 소유권이 미국에서 파나마로 넘어가면서 전략적 중요성이 커진다. 파나마의 정재계 유력 인사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고심하던 앤디는 고급 양복점 재단사인 해리(제프리 러시)를 찾아간다. “영웅 없는 카사블랑카”라는 해리의 대사처럼 영화에서 파나마는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인간 군상이 뒤섞이는 곳으로 묘사된다.

시종 무거운 톤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존 르 카레 원작의 다른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비교적 가벼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미소를 잃는 법이 없는 ’007′ 브로스넌 덕분일 것이다. 가볍게 던졌던 빈말이 순식간에 무력 분쟁으로 비화하고, 좌절한 주정뱅이를 저항군 지도자로 떠받드는 내용은 지독할 만큼 풍자적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해리가 재단하는 건 과연 옷감일까, 이야기일까. 말이 현실을 낳는 이야기의 속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재단사 해리의 아들 역으로 출연한 아역 배우가 미래의 ‘해리 포터’인 대니얼 래드클리프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년)

3)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년)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화끈하게 적들을 때려눕히고 응징한다면, 첩보물은 상처투성이인 채로 힘겹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렇기에 첩보물은 처음부터 눈부신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잘해야 무승부 아니면 패배가 예정된 장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 음울하고 비관적인 누아르의 정서가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런 첩보물의 장르적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2011년 영화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다. 조직 수뇌부에서 암약하는 소련의 이중 첩자를 잡아내기 위한 비밀 색출 팀이 꾸려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영화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는 용의선상에 있는 요원들의 암호명으로 쓰인다.

게리 올드먼, 톰 하디,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어느 한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지 않는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러 배우들이 동등한 비중을 맡는 ‘앙상블 캐스팅’은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의심하는 스파이물과도 잘 어울린다. 냉전 이후에도 여전히 냉전 시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첩보물은 다분히 복고적인 장르다. 하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타락이라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2014년)

4)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2014년)

‘모스트 원티드 맨’은 숨가쁠 정도의 빠른 전개와 반전의 연속만이 첩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처연할 만큼 느린 영화의 속도는 주인공의 처절한 패배를 부각하는 효과적 장치가 된다. 이 작품은 스릴러와 첩보물의 외피를 둘러쓴 누아르 영화이자 중년 남성의 실패담이기도 하다.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과 영화의 설정이나 전개는 흡사하다. 하지만 영화의 느린 속도감은 소설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어쩌면 속도감은 영화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는 효과적인 무기일지도 모른다. 원작은 체첸과 러시아의 분쟁이나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불신을 알뜰하게 소재로 활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포스트 냉전 시대’의 스릴러에 필요한 공식을 모두 담아 놓은 교과서와도 같다. 이 영화가 명배우 필립 시무어 호프만이 생전에 출연했던 마지막 완성작인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수작(秀作)으로 영원히 그를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5)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2018년)

“사자를 잡으려면 장난감 염소로는 안 돼요. 살아 있는 염소를 써야죠. 진짜 냄새와 진짜 맛과 심장이 있는 염소.”

존 르 카레의 첩보물에는 선악의 명징한 대립 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틀 드러머 걸’에 나오는 사자와 염소에 대한 비유처럼, 적을 속이기 위해 우리 편까지 감쪽 같이 속여야 하는 간계만이 있을 뿐이다. 적과 아군 사이에 어떤 도덕적 우월성이나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 모호함이야말로 존 르 카레 작품의 역설적인 매력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이스라엘 정보 기관과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사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 존 르 카레 원작의 드라마. 목표 대상을 체포하기 위한 첩보 작전을 각본을 짜고 배우를 섭외하는 공연에 비유한 착상이 놀랍다. 관객이 지켜보느냐 여부만이 다를 뿐, 첩보 공작과 연극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기라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또 하나의 ‘극장’인 셈이다. 후배 작가 존 그리샴은 원작 소설에 대해 “무척 영리하고 훌륭한 플롯을 지니고 있어서 4~5년마다 읽는 책”으로 꼽았다.

당초 박찬욱 감독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연출자로 물망에 올랐지만 무산된 이후, 영국 BBC의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연출을 맡았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인물을 하나의 화면에 병치시키는 장면은 ‘올드 보이’를 연상시킨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의 키스 장면 등 엄청난 스케일이 돋보이지만,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디테일에 집착하는 감독의 장기는 이 시리즈에서도 어김없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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