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9금 말장난을 쉬지 않고 내뱉는 데드풀이 산산조각 난 20세기폭스 로고를 밟고 우뚝 섰다. 수명이 다 한 줄 알았던 울버린의 손을 잡고서다.

24일 개봉한 ‘데드풀과 울버린’은 시리즈 세 번째 영화이자 20세기폭스가 월트디즈니컴퍼니에 넘어간 뒤 나온 첫 영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5의 네 번째 작품이다. 견고하던 기존의 세계관을 잇는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연기, 각본, 제작에 참여하며 영리하게 데드풀 시리즈를 이끌어온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와 숀 레비 감독의 현명한 선택들이 모여 최선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최선이었으나 최고는 아니었다. ‘마블 메시아’ ‘마블 구세주’를 자처한 데드풀이지만 구원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마블에게 인공호흡기를 달아 생명을 연장해준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는 히어로 생활에서 은퇴한 후, 평범한 중고차 딜러로 살아가던 ‘데드풀’이 예상치 못한 거대한 위기를 맞아 모든 면에서 상극인 ‘울버린’을 찾아가게 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로건을 되살리려면 멀티버스(다중우주) 세계관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건 관객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다. 평행우주, 시공간 이동을 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미 죽어버린 이를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데드풀이 로건의 부활을 위한 변명으로 소재를 단순히 빌려온 데서 그친 게 아니라, 울버린의 멱살을 잡고 멀티버스의 구렁텅이 속으로 함께 떨어진 데 있다. 2019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이 하락세를 걷게 된 주요인인 이 설정에 잡아먹혔다.

영화는 마블 드라마 ‘로키’를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졌다. 로키에 나오는 ‘시간 변동 관리국’(TVA‧시간과 우주를 관할하는 기관)과 보이드(TVA 추방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 하나만을 위한 ‘필수 선행학습’으로 꼽히는 게 벌써 로키 시즌1(6부작)과 영화 로건, 데드풀 1‧2편 등 세 개가 넘는다.

이러한 방대한 세계관은 여전히 높은 장벽으로 남아있다. 남다른 입담을 자랑하는 데드풀도 설정을 설명하는데 지쳐보였을 정도다. 설정이 과다하다 보니 그만큼 전개는 늘어졌다. 마블도 이러한 문제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데드풀의 입을 빌려 풍자하면서 반성문을 쓰는 듯 하면서도, 여전한 미련을 드러냈다. 페이즈 4에 접어들면서 피로함을 호소하며 이탈했던 팬들을 잠시 불러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새 관객을 유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데드풀이 날리는 대사처럼 마블은 이제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멀티버스 세계관을 접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다행히 데드풀만의 매력은 여전하다. 데드풀의 재미는 무자비한 액션과 때때로 상스럽고 천박하게까지 느껴지는 농담에서 나온다.

시작부터 자신과는 달리 숭고한 희생으로 아름답게 퇴장한 울버린의 무덤을 ‘파묘’하고도 모자라, 그의 아만타디움 뼈를 하나하나 떼어 시신을 욕보인다. 애정, 존경을 표현하는 데드풀만의 방식이다. 적의 머리와 중요부위 등을 난자하며 거리낌 없이 잔혹함을 드러내는 액션은 관객으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낭자한 선혈 위로 여러 신체 부위가 날아다니는 시원한 연출이 이어진다. 재생능력을 갖춘 데드풀과 울버린이 맞붙는 장면도 볼거리다. 이들이 온 힘을 다해 박진감 넘치게 싸우면서 점차 호흡을 맞춰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특히 극과 관객의 경계 ‘제4의 벽’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드는 데드풀의 재치도 한 몫 한다. 하지만 이 농담들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선 MCU, 코믹스, 엑스맨 세계관을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소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디즈니의 폭스 인수는 기본. 레이놀즈의 아내가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라는 사실, 라이블리가 드라마 가십걸에 출연한 것, 휴 잭맨의 이혼, 유명 배우가 울버린으로 캐스팅 됐다는 과거 루머까지도 알아야 한다. 대중문화를 레퍼런스로 삼은 드립도 만만치 않게 많다. 영화 어벤져스1의 쿠키영상 속 슈와마, 매드맥스와 퓨리오사, 데어데빌, 판타스틱4, 스타트렉 시리즈 등을 차용한 농담이 쏟아진다. 할리우드 소식에 밝지 않으면,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기존 마블 팬, 엑스맨 팬 모두를 기쁘게 할 반가운 얼굴들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깜짝’ 출연이다. 팬들을 잠깐 웃게 만드는 데에는 제격이지만 그 재미도 잠시뿐이다. 큰 힘을 쓰지는 못한다. 오직 관객을 놀라게 하는 용도로만 소비되고 사라지는 듯 보인다.

엔딩크레딧까지 이르면 폭스의 히어로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의 촬영 현장 비하인드가 나타난다. 이를 보고있자면 이 영화가 데드풀이 부르는 긴 장송곡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비속어를 섞어가며 “폭스 놈들아, 난 디즈니로 간다”고 외친 데드풀의 버르장머리 없는 추모 방식이다. 이제 폭스를 뒤로 하고 떠날 차례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첫 발걸음으로는 손색없는 작품이었다. 데드풀이 결국엔 ‘마블 지저스’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