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뮤지컬 ‘영웅’을 공연 중인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로비. 길게 늘어뜨린 안중근 의사 시절의 태극기들 앞에 서자, 배우 정성화의 눈빛은 금세 의거를 앞둔 피 끓는 젊은이의 그것처럼 변했다. 정성화는 “안중근을 연기했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분께 누가 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모든 게 안갯속이었어요. 우리가 잘 만들긴 한 건지, 관객들에게 통할지…. 막이 내려갔는데, 무대 뒤에서 보니 그냥 보통 기립 박수가 아니라 모든 관객이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시는 거예요.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19일 인터뷰를 통해 배우 정성화가 '안중근'으로 거듭나는 뮤지컬 ‘영웅’의 순간들을 이야기했다.2023.4.19 /김지호 기자

이제 그의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겹쳐 떠오른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은 지금 진행 중인 공연까지 아홉 시즌 동안 이미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배우 정성화(48)는 내달 21일까지 예정된 이 공연을 마치면 333회 안중근 역할로 무대에 서게 된다. 전체 686회 공연 중 49%, 관객들이 만난 안중근의 절반은 정성화의 몫이었다. 공연장인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최근 만난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다. 정성화는 망설임 없이 2009년 첫 공연 날의 커튼콜을 꼽았다. “아직도 그날 관객들 열광을 잊을 수 없어요. ‘이게 먹히는구나, 대단하구나’ 하며 감격했죠.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어요.”

학교 다닐 때도 개근상밖에 타본 게 없던 이 남자는 ‘영웅’으로 2010년 더 뮤지컬 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후로는 상복도 터졌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2007)의 ‘돈키호테’ 역할이 그에게서 개그맨 라벨을 떼어냈다면, ‘영웅’은 그를 한국 톱 뮤지컬 배우 반열에 올려놓았다.

관객 100만 돌파를 기념해 뮤지컬 '영웅' 출연진과 창작진이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에이콤

2011년 ‘영웅’이 공연 메카 뉴욕의 심장 ‘링컨 센터’에 입성했을 때, 처음 객석과 무대를 바라봤던 감격도 잊지 못한다. “아,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어요.” 첫 공연을 마친 뒤 연미복과 드레스로 성장(盛裝)한 뉴욕 관객들은 백발이 성성한 이들까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숙소행 버스 앞에서 기다리던 한 현지인 관객이 그를 붙잡고 “강렬한 안무와 음악, 특히 주인공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의 에너지에 감탄했다”며 칭찬했다. 정성화는 “감사 인사를 하며 ‘그 주인공이 바로 저예요’ 했는데, 무대 밖 털털한 모습과 겹쳐지질 않는지 못 믿겠다는 듯 ‘에이, 거짓말쟁이(liar)’ 하더라”며 웃었다.

초연부터 14년,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성화는 “2019년 영화 ‘영웅’ 촬영을 준비하느라 급격히 살을 빼며 공연도 병행하던 때, 무대에서 마지막 독창 부분을 부르는데 숨을 오래 참다가 정신을 잃듯 ‘블랙 아웃’돼 버린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무대 바닥에서 높이 올려진 교수대에 선 채 부르는 노래라 앞으로 고꾸라지면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힐 상황이었어요. 정신을 잃으면서도 눈앞의 교수형 올가미를 붙잡았습니다. 비록 소품이지만 사람 잡는 올가미가 절 살렸으니 이게 살아도 죽어도 무대를 지켜야 할 팔자인가 보다 싶었지요.”

뮤지컬 '영웅' 중 하얼빈 의거 뒤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일제 재판을 받는 장면. 뮤지컬에선 '누가 죄인인가'라는 유일한 넘버가 흐른다. /에이콤

정성화와 함께 ‘영웅’은 이제 K뮤지컬의 클래식이 됐다. 관객을 사로잡은 음악과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대본집도 출간되는 등 하나의 브랜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300번 넘게 안중근에 빙의했던 이 배우는 그 초인적 정의감과 애국심, 희생정신을 이해하게 됐을까. “진정으로 이타적인 분이었다고 생각해요. 또 그 이타심을 나라 사랑, 인간애로 승화시켜 실제 행동으로 옮긴 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제가 그 마음 어떻게 완전히 알 수 있겠어요. 다만 무대 위에선 그분의 나라 잃은 울분을 제 가족에 대한 마음으로 치환해 겨우 이해하며 감정 표출의 수위를 조절해 갑니다.”

그가 14년간 흔들림 없이 ‘안중근’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연습벌레’로 유명한 배우 조승우가 “징글징글하다”고 우스개를 건넬 정도로 지독하게 연습하기 때문이다. “함께 ‘맨 오브 라만차’를 했거든요. 연습이 10시 시작인데 제가 8시에 나오는 걸 보고 조승우씨도 그러겠다고 하길래 저는 다음 날 7시 반에 연습장에 나와서 먼저 연습했죠, 하하. 저는 ‘긴장성 배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으면 무대에서 떨리는 완벽주의자 같아요.”

19일 뮤지컬 ‘영웅’을 공연 중인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로비. 길게 늘어뜨린 안중근 의사 시절의 태극기들 앞에 서자, 배우 정성화의 눈빛은 금세 의거를 앞둔 피 끓는 젊은이의 그것처럼 변했다. 정성화는 “안중근을 연기했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그분께 누가 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한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정성화에겐 열 살 첫째와 둘째·셋째인 여섯 살 쌍둥이가 있다. 아이들은 집에 가면 자주 영화 ‘영웅’을 틀어놓고 있고, 특히 첫째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빠가 안중근인 걸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는 “뮤지컬 ‘안중근’을 하면서 자연인 정성화도 자연스럽게 더 조심스럽고 신중해졌다”며 웃었다. “아이들한테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알려줄 수 있어 기쁘고 또 책임감이 무한대로 샘솟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분을 연기했던 사람으로서 누가 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느라 사는 데 제약이 많아지는 면도 있어요, 하하하. 친구들과 한잔할 때도 조심스럽고요. 쓰레기 분리수거 할 때도 더 깔끔하게 잘하려고 애쓰고요.”

정성화는 “14년 안중근을 연기하는 동안, 힘을 주고 강하게만 표현하려 욕심부렸는데, 이제는 더 자연스럽고 세밀한 감정 표현에 공을 들이게 된다”고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부담 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가족 코미디 뮤지컬도 해보고 싶어요. 무대 위의 정성화, 계속 새로운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