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러리컴퍼니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티켓을 연 객석은 공연 한 번에 단 180석뿐. 하지만 지난달 8일 개막한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이 적은 객석수만으로 공연예술통합전산망 기준 연극 티켓 예매액 1위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동명 영화(2015)를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처음 연극으로 만들었고, 그 이야기에 반한 한국 관객들이 극장을 찾아와 울고 웃는다. 제작사 라이브러리컴퍼니는 “매진 회차가 늘어나면서 발코니석 등의 티켓을 추가로 열고 있다”고 했다.

첫째 사치(박하선·한혜진), 둘째 요시노(서예화·임수향), 셋째 치카(강혜진·류이재) 세 자매에겐 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가족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떠났던 아버지가 있다. 어느 날 날아온 부고를 듣고 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배다른 동생 스즈(설가은·유나)를 만난다. 어쩌면 미운 여자의 자식. 하지만 엄마까지 제 삶을 찾아 떠나버린 뒤 할머니 집에서 자랐던 자매는 천애고아가 된 스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연극은 이 네 자매가 각자의 시련을 통과하며 더 단단한 가족이 되어가는 단순명료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110분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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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연극의 매력은 사랑스러운 네 자매의 티격태격 일상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친밀함이다. 둘째 요시노와 셋째 치카가 매실주에 취해 귀여운 술주정을 하면 첫째 사치는 “이것들이!” 하며 쫓아간다. 어느 시절엔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었을 가족과의 아름다운 추억, 괜히 가슴 한쪽이 시큰해지면서 미소가 지어진다. 낯선 언니들에게 얹혀 살게 된 막내 스즈를 연기하는 어린 배우들은 놀랍다. 조심스러웠던 마음을 조금씩 열며 객석을 향해 조근조근 속엣말을 털어놓으면, 관객은 불가항력적으로 그 감정의 굴곡에 귀 기울이게 된다.

영리한 무대와 조명이 영화에선 느낄 수 없는 연극적 매력으로 이야기의 효과를 끌어올린다. 단차를 둬 오르내리도록 만든 무대는 경사지게 하면 자매가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이 되고, 중간만 솟아오르면 자매가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집이나 툇마루로 변한다. 불 꺼진 무대 위를 풍성한 매화나무 가지 그림자가 꽉 채울 때, 자전거를 타고 벚꽃 터널을 달리는 스즈와 남자 친구의 머리 위로 조명이 비추며 꽃비가 내릴 땐 감탄이 나온다. 파도 소리는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밀려가는 듯하고,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 돌을 던질 때는 관객 머리 뒤에서 마지막 ‘퐁당’ 소리가 들린다. 몰입을 돕는 입체적 음향 디자인의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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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치 역의 박하선과 한혜진은 TV 드라마 출신 배우들에게 따라다니는 무대 연기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듯 안정적이다. 대학로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연극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서며 균형을 맞춰주는 덕도 크다. 특히 자매의 애인들부터 동네 아저씨까지 남자 역할을 도맡는 이강욱, 엄마부터 할머니까지 대부분 여자 역할을 혼자 소화하는 이정미 등 ‘멀티’ 배우의 천연덕스러운 변신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이 역시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 포인트다.

가마쿠라 최고의 잔멸치 덮밥을 해주던 식당의 니노미야 아줌마가 병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간다는 말에 둘째 요시노는 말한다. “너무 화가 나네요. 신이 있다면 그놈한테 너무 화가 나요.” 회사 선배가 한숨 쉬듯 답한다. “그러게, 신이라는 놈은 우리를 생각해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우리를 생각해주는 수밖에 없겠지.” 보고 나면 주변 소중한 사람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어지는, 쌀쌀한 가을에 잘 어울리는 웰메이드 연극이다. 공연은 19일까지.

각자의 시련을 겪으며 단단한 가족이 되어 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 오른쪽부터 첫째 사치(박하선), 둘째 요시노(임수향), 셋째 치카(류이재), 막내 스즈(유나). /라이브러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