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9일 개막 뒤 6일 39회째 공연까지 전 회 차 전석 매진. 놀라운 흥행 질주, 연극사에 유례가 드문 기록 행진이다. 신구(88), 박근형(84), 박정자(82), 김학철(65) 등 해가 바뀌어 한 살 더 나이 든 배우들은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 주 6회 공연을 거뜬히 소화하고 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막이 오르기 1시간쯤 전, 분장을 마친 배우 신구(왼쪽)와 박근형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두 배우가 주역을 맡아 이끄는 이 연극은 유례없는 전회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장련성 기자

지난달 30일 막이 오르기 전 ‘고도’ 흥행의 두 주역, 물처럼 막힘없는 ‘에스트라공(고고)’ 신구와 불처럼 뜨거운 ‘블라디미르(디디)’ 박근형을 만났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본래 철학적 대사의 장광설, 난해한 구조와 메시지로 이름난 부조리극. 이 어려운 연극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묻자 신구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평생 처음이니까.” 실은 신구 배우는 ‘앙리 할아버지와 나’ ‘라스트 세션’ 등 그동안 공연한 대학로 극장마다 구름 관객을 몰고 다닌, 연극판에서도 흥행 배우다.

박근형은 “처음 몇 번은 매진이라니 좋았는데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던 디디와 고고가 마지막에도 무대를 떠나지 못할 때 관객들이 그렇게 운대요. 덜컥 가슴에 걸리더라고요. 관객은 자기 자신이 안쓰러워 우는 건가, 여든 넘은 늙은이들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안쓰러워 우는 건가. 지금도 불가사의해요.” 박근형의 진지한 말을 신구가 쿨하게 받아넘겼다. “에그, 거 우는 관객이 몇이나 된다고.” 박근형이 “아니 형님, 많이들 운다니까요” 하자 분장실의 배우들이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제작사 파크컴퍼니 박정미 대표는 “손현주·연운경 등 연극을 보러 온 배우들도 분장실로 찾아와서는 아무 말도 않고 선생님들 껴안고 그렇게 울기만 하다 가더라”라고 했다. 관객들은 이 연극을 보며 각자의 이유로 운다. 그 눈물이야말로 두 배우가 이 연극을 계속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세월의 덧없음, 관계의 허무함 같은 서글픈 감정을 건드리는 ‘고도’는 사실 보고 나면 우울해지기 쉬운 연극. 하지만 이번 프로덕션의 가장 큰 특징은 현학적이거나 비관적인 대사가 이어지는데도 오히려 관객들이 자주 크게 웃는다는 점이다. 신구는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가자는 건 오경택 연출가가 주안점을 둔 부분이었다”고 했다. “연출가가 외국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땐 관객이 다들 웃으면서 즐기더래요. 해석에 따라 수백가지 버전을 만들 수 있겠지. 우리는 이번에 우리 생각대로 가자, 그게 잘 맞은 것 같아.” 박근형이 “처음부터 이건 희극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시작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무대에서 엇갈리는 웃음과 눈물이 드러내는 것은 결국 생과 사, 집착과 허무, 생의 기쁨과 슬픔이 모두 경계를 넘어 스며들고 교직(交織)되는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세계다.

극단 산울림의 오증자 교수 번역본을 근간으로 변형을 최소화하되, 시대에 따라 베케트 스스로 개작했던 불어 원본들과 영어 번역본들을 교차 대조해 말맛을 살리고 다듬어낸 창작진의 노력도 큰 몫을 했다. 박근형은 “관객 입장에서도 저 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억지로라도 저렇게 견디고 있구나, 그렇게만 봐준다면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대사 하나하나에 매달려서 분석하고 의미를 찾다 보면 따라잡질 못해요. 그래서 일부러 생각할 여유가 없도록 우리가 템포를 빨리 가져가고 있어요.” 실제로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 날은 수 분씩 러닝타임이 줄어들기도 한다.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이 연극의 대표적 특징. 조용한 무대에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거의 까치발로 걷는다. 신구는 엉덩이 고관절에 통증이 생겨, 인터미션 시간이면 박근형이 마사지건을 들고 신구의 통증 부위를 마사지해주기도 한다. 신구는 “지난 주말에 받은 물리치료가 과했는지 왼쪽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면서도 연신 웃었다.

20회 연속 전 회 전석 매진 기록을 기념해 '만원 사례' 봉투를 들고 분장실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배우들. 왼쪽부터 '소년' 김리안, '포조' 김학철, '럭키' 박정자, '블라디미르' 박근형, '에스트라공' 신구. /파크컴퍼니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무대에 서 온 두 사람도 여전히 떨릴 때가 있을까. 박근형은 “여전히 매번 공연 시작 5분 전 종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대고, 무대 옆에 딱 서면 가슴이 막 벌렁벌렁해서 숨을 자꾸 크게 쉬어야 한다”고 했다. 옆에서 듣던 신구도 “무대로 오르기 직전엔 몸 상태가 달라진다. 심호흡하면서 진정시키다가 첫 대사를 시작하면 그제야 안정이 되면서 무대로 녹아든다”고 했다. 박근형이 “그러면 이제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왕성해지면서 그냥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받았다. 분장실에서도 무대 위 고고와 디디처럼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이다. 신구는 ‘고도’의 대사 중에서 “둘이 같이 있으면 뭐든 풀어낸다고. 그렇지 디디? 살아 있단 걸 실감할 수 있게”하고 말하는 부분이 맘에 든다고 했다. “나도, 연극을 할 때 살아 있는 게 실감나는 것 같아.”

이제 ‘고도’의 서울 남산 국립극장 공연은 7일부터 18일까지 딱 11회가 남았다. S석 5만5000원, R석 7만7000원. 이후 강동아트센터(23~24일)를 거쳐 세종(3월 15~16일), 대구(3월 29~31일), 고양(4월 5~6일), 대전(4월 13~14일) 등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