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한 곡의 힘이 세상 무엇보다 강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얼마 전에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지하 대피소에서 한 소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전해져 세상을 울렸죠. ‘이 나라와 사람들은 여전히 꿋꿋하구나, 아직 희망이 있구나….’ 그 노래 한 곡에 모두가 그렇게 믿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었어요.”

26일 개막하는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으로 처음 창극 연출을 하는 박칼린 연출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위에 설치된 거대한 나무 앞에 앉은 그는 "아픈 세상을 위로하는 예술의 힘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국립창극단

배우, 음악감독, 연출가, 합창 예능 지휘자, 트롯 경연 프로그램 심사위원까지. 전방위 예술가 박칼린(57)의 다음 도전은 우리 창극이다. 오는 26일부터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창극단 ‘만신: 페이퍼 샤먼’(이하 ‘만신’)에서 그는 공동 극작과 음악감독, 연출까지 맡았다. 개막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국립극장에서 최근 만난 박칼린 연출은 “요즘 해외에선 샤먼을 ‘예민한 자’라 부른다. 땅과 물, 바다와 바람에 깃든 슬픔을 예민하게 느끼고 풀어주는 역할”이라며 “세상이 아플 때 예술이 할 수 있는 일도 결국 위로와 치유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라고 했다.

◇샤먼들과 韓 소녀의 해원(解冤) 여정

창극 ‘만신’은 남다른 운명을 타고난 한 소녀가 북유럽, 아프리카, 아마존, 아메리카 원주민 등 세계의 샤먼들과 함께 곳곳 땅과 역사에 깃든 슬픔을 어루만지는 해원(解冤)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 낯설지만 흥미로운 소재에다 박칼린이 만드는 창극이라 관객들의 관심도 뜨겁다. 1200여 석 대극장인 해오름극장이 VIP석은 이미 다 매진됐고, 2층과 3층 몇 자리만 띄엄띄엄 조금씩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왜 만신과 샤먼 이야기일까. “미국 동부 해안엔 해마다 허리케인이 닥쳐와 집과 사람을 쓸어가죠. 노예로 끌려가다 그 앞바다에 수장(水葬)된 아프리카인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거기 가서 용왕굿 한번 해주면 어떨까요? 나치가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유럽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죠. 씻김굿 한판 벌이면 그 땅에 깃든 슬픔이 조금 잠잠해지지 않을까요? 열대우림 파괴로 사라진 아마존의 나무들, 멸종당한 생명들의 넋도 위로하면 좋겠고요. 그렇게 하면 제 속도 좀 시원하겠더라고요.”

주인공 '실'역의 김우정(왼쪽)과 박경민. /국립창극단

◇”위로와 치유는 예술의 근원적 힘”

박칼린 연출은 “내 어머니도 2차 대전 말기 소련과 독일이 진군해 오던 고국 리투아니아를 떠난 이민자였다”고도 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난민 수용소에 있을 때, 해가 지면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대요. 지친 사람들이 모여 그 음악에 위안받았다고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그런 예술의 힘은 변함없죠. 우리도 이제 K팝, K컬처로 주목받는 문화 강국이잖아요. 우리 문화, 우리 소리가 아픈 세상을 달래는 데 역할을 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어요.”

리허설로 먼저 지켜본 창극 ‘샤먼’은 이질적인 동서양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려 노는 듯하다. 창극은 본래 판소리 병창에 서양 연극·오페라 기법을 덧입혀 탄생한 혼종 장르. 이질적인 것들을 제 안에 녹이는 융합의 힘은 어쩌면 창극이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극 속에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어마어마한 역사를 풀어내야 하는데, 이걸 무대에서 어떻게 다 구현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소리꾼들은 혼자 무대에 서서 삼국지 적벽대전부터 토끼와 거북의 바닷속 용궁까지 다 표현하잖아요. ‘그래, 세계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잖아!’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죠, 하하.”

◇“소리꾼은 세계 최고 스토리텔러”

굿의 구음(口吟)은 물론 의상과 방울 같은 무구(巫具)까지 ‘국가대표 무당’으로 불렸던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김금화(1931~2019) 만신에게 배운 이해경 만신을 통해 고증받았다. 작창(作唱)은 명창 안숙선 선생이 전쟁으로 스러진 넋들을 위로하는 비무장지대 부분을, 외국 샤먼들의 다양한 소리는 창극단원 유태평양이 나눠 맡았다. 서양음악은 박칼린 연출과 작곡가들이 팀을 이뤄 썼다.

요즘 창극은 최고의 창작자들이 다들 뛰어들고 싶어 하는 가장 뜨거운 장르다. 그동안에도 한태숙, 이성열, 고선웅 등 우리 공연계를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각자 개성을 담아 새로운 창극을 선보였다. 그렇다면 ‘박칼린표 창극’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내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무언가는 아직도 한참 뒤에나 생길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지금껏 공연을 만들며 알게 된 건 하나 있어요. 저는 엄청 슬픈 걸 행복한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 같아요. 눈물나는 이야기도 결국엔 흐뭇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게 하는 것, 박칼린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 아닐까요.”

박칼린 연출은 “제목 보고 오컬트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오해다. 종교적인 이야기도 전혀 아니다”라며 또 웃었다. “선입견 없이 그냥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딱딱하게 앉아 있지만 마시고, 웃기면 웃고 좋은 장면이 나오면 박수 치고 환호해주세요. 극장이 소란스러웠으면 좋겠습니다!”

공연은 30일까지, 2만~8만원.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

만신’은 여성 무당을 높여 부르는 말. ‘페이퍼 샤먼’의 ‘페이퍼’는 무속(巫俗)에 널리 쓰이는 순수하고 청결한 이미지의 한지를 가리킨다. 영험한 힘을 지니고 태어나 만신이 된 소녀 ‘실’(김우정·박경민)이 북유럽, 아프리카, 아마존, 아메리카 원주민 등 각 대륙의 샤먼들과 함께 세상 곳곳의 비극과 고통을 치유하러 떠나는 여정 이야기. 한국적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와 무구(巫具) 등에 한지를 적극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