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한국 창작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개막에 맞춰 방한해 첫 공연을 본 원작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는 “음악이 아름답고 배우의 가창력도 매우 훌륭했다. 영상과 무대 디자인의 절묘한 조화가 느껴져 원작자로서 무척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이케다 리요코 프로덕션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도, 또 한국에서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원작 만화가라는 이유로 평범한 아줌마인 저를 반갑게 환영해주세요. 그럴 때마다 참으로 기쁩니다. 처음 만화 연재를 시작한 지 반세기가 넘어 저도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여전히 기억하고 사랑해주시고, 이렇게 한국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는 것까지 보게 됐네요.”

16일 한국 창작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연출 왕용범, 작곡 이성준) 개막일에 맞춰 방한, 공연이 열리는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원작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76)는 “이 무대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작가로서 큰 기쁨”이라고 했다. 원작 만화는 일본에서만 2000만부 이상 팔렸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로 500만 이상의 관객이 봤으며, TV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애니메이션이나 다카라즈카 공연도 굳이 챙겨보지 않았다고 들었다. 한국판 뮤지컬 개막에 맞춰 방한해 첫 공연을 관람하게 된 이유는.

“47살에 도쿄 음악대에 입학해 클래식 성악을 공부하고 직접 공연도 하고 있다. 성악을 배우며 느낀 것이지만, 한국인의 목의 힘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소프라노 조수미씨를 무척 동경했다. 이번 뮤지컬도 춤은 물론 노래도 굉장히 훌륭하다고 들어서 큰 기대를 갖고 오게 됐다. 요즘 일본엔 K팝을 동경하고 춤과 노래를 따라 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지 경험해보고 싶었다.”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 공연 장면. /EMK뮤지컬컴퍼니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처음 뮤지컬 제작(1974)을 제안했을 때, 무대에서 잘 표현될지 걱정하진 않았나.

“다카라즈카에서도 사실 소녀 순정 만화를 원작으로 상연하는 것은 첫 시도여서 내부적으로 찬반 양론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소녀 만화의 지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소녀 만화 따위’라는 말도 나왔다. 일본판 뮤지컬에 대해선 ‘다카라즈카와 소녀 만화의 행복한 결혼’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한국 뮤지컬에 대해 기대하는 점은.

“한국 분들의 목소리와 춤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백스테이지로 들어가 보니 마치 이탈리아의 큰 극장처럼 모두 수작업으로 만든 멋진 의상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의상을 보고 굉장히 감동했다.”

–처음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에게 천착한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소녀 만화의 세계에서 역사물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매우 순수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죽음 직전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고 고귀하게 죽어간 그 여인의 일생에 매료됐다. 그리고 직접 1회 차를 쓰면서 ‘이 작품은 절대 대히트를 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역_옥주현. /EMK뮤지컬컴퍼니

–한국에서도 당신의 작품이 큰 인기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애니메이션은 한국, 대만은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방영됐다. 특히 가장 먼저 팬클럽이 생긴 곳이 이탈리아였고 그 다음이 프랑스인데, 두 나라의 팬들은 지금까지도 서로 자기들이 유럽 최초 팬클럽이라고 다투고 있다, 하하. 유럽에서는 ‘레이디 오스카’라는 타이틀로 방송됐는데,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또 한국에 와도 반갑게 맞아주실 때마다 정말 기쁘다.”

–주인공 오스칼을 남장 여성 군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외할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셨다. 어려서부터 군대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프랑스혁명 당시 민중의 편으로 돌아선 왕실 군대가 실재했다는 걸 알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젊은 남자 군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스칼을 여성으로 설정했다, 하하.”

–이 작품을 시작한 이유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매료됐기 때문인데 한국판 뮤지컬에선 앙투아네트의 비중이 적다. 아쉽지 않은가.

“처음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릴 때, 오스칼이 안드레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는 페르젠을 향한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 첫사랑에 실패했다는 것이 그녀에게 인생의 굉장히 큰 전환점이라 생각하는데, 한국엔 이미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 그렇다면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대대로 왕실 호위 임무를 맡아온 자르제 백작 가문의 막내딸이지만 남장 군인으로 성장, 근위대장이 되어 왕비 앙투아네트를 지킨다. 한국 뮤지컬에선 옥주현·김지우·정유지 배우가 연기한다. /이케다 리요코 프로덕션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와 픽션 속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는 어떻게 고민했나.

“제 작품이 나올 때까지도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은 아마 역사 수업에서 프랑스 재정을 파탄 내고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만든 나쁜 여자라는 식으로만 인식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나도 리셉션에 불려갔다. 그때 대통령 수행원들이 내게 다가와서 ‘저는 당신의 작품으로 프랑스혁명을 공부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때 굉장히 기뻤다. 일본인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혁명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이 ‘당신의 작품을 읽고 역사 시험에서도 그 부분만큼은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최근 일본에서도 K팝 붐이 일고, 한국에서도 뉴진스 도쿄돔 공연을 계기로 일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오페라 극장에 가보면, 내년이면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관객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관광객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페라가 이탈리아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는 교류를 거듭하며 서로 좋은 점을 찾아내어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오가면서 형태를 바꿔가며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유명 서점 리브라치오 일본 만화 코너에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의 등신대 입간판이 전시돼 있다.(왼쪽 사진) 서가에 진열된 이탈리아어판 '베르사이유의 장미' 만화책. /밀라노=곽아람 기자

–한국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만화로 연재(2007)해 다카라즈카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나는 역사에서 시작했다. 도요토미 시대, 일본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순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면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중근 같은 훌륭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만화가 아닌 글로 썼다. ‘역사의 그림자 속의 남자들’(1996)이라는 책에 들어 있다. 내 아버지의 고향은 나라(奈良)인데, 그 이름이 한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일본어 속에는 옛 한국어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원래 한국어였다는 것도 아마 지금의 젊은 일본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계속 공부하면서 일본인들이 조금 더 양국의 오래되고 깊은 관계를 이해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1972년 첫 연재를 시작, 2013년 누적 판매 2000만부를 돌파한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76)의 데뷔 장편 만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한국 창작 뮤지컬 ‘베르사유의 장미’가 16일 충무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원작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베르사유를 무대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연인 폰 페르젠 백작, 왕비의 근위대장인 남장 여인 오스칼과 곁에서 그를 지키는 앙드레 그랑디에가 주인공인 역사 픽션. 한국판 뮤지컬은 오스칼과 앙드레 이야기가 중심이다.

일본에선 만화가 대히트한 뒤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1974년 뮤지컬로 초연했다. 2014년 관객 500만명을 넘어서며 이 가극단 사상 최대 히트작이 됐다. 프랑스·일본 합작 실사 영화와 TV·극장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됐다. TV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다. 작가는 2008년 프랑스 문화를 알린 공로로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