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사(山寺)의 선방(禪房) 같았다. 지난 13일 오전 경기 여주에 자리한 작가 김아타(64)의 미술관 ‘아르테논’. 10여명이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명상에 든 컴컴한 전시장은 옷깃 스치는 소리도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참석자들 면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철학자 이주향 수원대 교수, 물리학자 부산대 이창환 교수와 예술계 인사들 그리고 통도사 방장 성파(81) 스님이 함께했다. 방장은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갖춘 종합수도원인 총림(叢林)의 최고 어른. 스님은 이날 새벽 6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통도사를 출발해 4시간 가까이 달려온 길이었다. 이날은 아르테논의 작은 개관식이었다. ‘아르테논’은 ‘아트+파르테논’의 합성어로 이곳을 예술과 철학, 종교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김씨의 꿈이 담긴 이름이다.
이윽고 성파 스님이 침묵을 깼다. “옛날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유일한 벗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를 깨버리고 다시는 연주를 안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아타는 알아봐주는 지음지우(知音之友)들이 이렇게 많으니 얼마나 좋은가.”
성파 스님과 김 작가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뜻의 ‘아타(我他)’라는 법명을 지어준 이도 성파 스님이다. 김아타는 특히 1998년 2월 22일 저녁을 잊지 못한다. 박물관 진열장 같은 유리 상자에 나체 남녀를 집어넣고 촬영한 사진 작업 ‘뮤지엄’ 시리즈로 화제를 모을 때였다. 종교의 벽도 넘어보고 싶었다. 통도사로 성파 스님을 찾아간 김 작가는 대뜸 “스님, 순수는 어떤 색입니까?”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진광불휘(眞光不煇)”. 김 작가는 “호되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후 ‘진광불휘’는 작가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가 됐다. 김 작가는 다음 날 모델들과 함께 머리를 깎고 법당에서 ‘뮤지엄-니르바나’ 시리즈를 촬영했다. 그날부터 20년 넘도록 삭발하며 ‘아타’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
이후 작가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작품 세계는 불교의 가르침과 닿아 있다. 뉴욕, 파리, 델리(인도) 등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에서 하루 8시간 셔터를 열어놓은 ‘온 에어’ 시리즈. 수백만명이 지나간 자리가 희뿌연 먼지처럼 보인다. 대도시의 일상을 촬영한 이미지 1만장을 포갠 ‘인달라’ 시리즈 역시 삼라만상의 구체적 형상은 날아가고 뿌연 먼지처럼 보인다. 얼음으로 만든 불상과 파르테논 신전이 녹아 없어지는 과정을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혹은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2010년대 들어 작가는 사진마저 내려놓았다. 대신 뉴욕, 파리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등 세계 곳곳에 빈 캔버스를 2년씩 세워두는 ‘온 네이처. 자연 하다’ 시리즈를 작업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자연 스스로 캔버스에 남긴 흔적을 작품으로 삼은 것. 또 군(軍) 포사격장에 캔버스를 세워두고 포탄과 파편에 찢긴 조각을 수거해 작품으로 발표한다.
스스로도 옻칠, 민화, 도자기 등으로 일가를 이룬 성파스님은, 20년 전 ‘진광불휘’라는 화두를 작가에게 던져준 이유에 대해 “빛 없는 가운데의 빛, 모든 것을 통섭하는 빛을 공부하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스님은 김 작가가 미술관을 만들고 포탄에 찢어진 캔버스 조각을 검정색으로 물들여 전시한 것을 보고, 전시장 바닥에 직접 검은 옻칠을 해줬다. ‘번쩍거리지 않는 빛’이란 화두를 들고 20년 동안 매진해온 제자에 대한 사랑과 격려였다.
이창환 교수는 “1만장의 사진이 하나로, 다시 공(空)으로 연결되는 김 선생의 작품은 과학자에게도 큰 영감을 준다”고 했고, 이주향 교수는 “작가는 이미 진광불휘 이전·이후의 색을 알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성파 스님은 “작품은 기분 내키는 대로, 발표할 때는 평균적 기준을 생각하면서 하시라”고 덕담한 뒤 통도사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