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분이 황제 폐하시라네요.”
1777년 4월, 프랑스 파리의 드 트레빌 호텔 앞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온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36세의 남자는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호텔에 묵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모르는 파리 사람은 없었다. ‘팔켄슈타인 백작’이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가 가진 여러 작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구빈원을 방문해 빈민들에게 주는 죽을 시식하고, 학술원 회의와 농인 수용소, 비누 공장을 둘러보는 황제의 행보에, 줄곧 사치스런 임금만 봐 왔던 파리 시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 비공식 방불(訪佛)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에게 시집간 누이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일이었다. 결혼한 지 8년이 지났는데도 마리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무래도 프랑스 왕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자 매제를 직접 만나보려 했던 것이다.
루이 16세를 만나본 요제프 2세는 “(그가 멍청하다는 소문과는 달리) 이야기를 나눠 보니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대단히 함축적인 얘긴데, 사실 그는 매제를 만나 아이를 가질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루이 16세에게 제대로 성교육을 해 줬다’는 야사 비슷한 얘기도 전한다. 대인관계 자체를 기피했던 루이 16세는 아내와의 성관계도 꺼렸다고 하는데, 처남을 만난 이후 이 문제는 해결됐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듬해 큰딸을 낳았고 모두 2남 2녀를 두게 된다.
다소 외설적인 스토리로 보이기도 하는 이 일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물론 용렬한 임금으로 유명한 루이 16세와 비교돼서기도 하지만 요제프 2세는 파리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정도로 개명하고 명철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가 소르본대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종교서적이 보관된 방에서 도서관장이 “너무 어두워 글씨를 읽을 수 없으니 송구하다”고 하자 “괜찮소, 종교라는 게 원래 밝은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라고 응답했다는 에피소드에선,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찍이 플라톤이 말했던 철인(哲人)군주의 일면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둘째, 유럽의 왕실끼리 통혼한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정략결혼이라면, ‘정략’이란 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희구였다.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이었지만, 온 유럽을 뒤흔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과 7년 전쟁(1756~1763)으로 큰 피해를 겪은 뒤였다.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인 누이동생이 후사를 낳도록 하는 것은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끝내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생 부부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나폴레옹에 의해 유럽이 또 다시 전화(戰禍)에 휩싸이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영화 ‘아마데우스’(1984)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탈출’을 관람한 뒤 “편안한 저녁 시간에 보기엔 음표가 너무 많다”며 혹평했던 황제가 바로 요제프 2세다. 모차르트 앞에서 이렇게 음악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는 건 마치 임영웅 앞에서 목청껏 ‘배신자’를 부르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음악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계몽군주(啓蒙君主·enlightened despot)란 말을 들었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설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는데, “이젠 이탈리아어가 아닌 우리말 오페라가 나올 때”라는 신하의 간언을 듣고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를 발주하는 영화의 한 장면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룬 계몽주의는 신(神)이 아닌 인간의 이성(理性)에 의해 의식이 형성돼야 한다는 철학 사조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줘 편견과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절대주의 시대 후기 일부 유럽 군주들은 그 ‘빛을 던져주는 역할’을 자신이 맡으려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와 함께 그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되는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다.
군주제라는 앙시앵 레짐(구제도)를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개혁은 상당 부분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었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요제프 2세는 농노제 폐지와 독일어 공용어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를 연상시키는 수도원 해산 같은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귀족과 종교의 힘을 빼려 했다. 상당수 개혁이 재위 기간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요제프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 정책은 이후 오스트리아 근대화의 근간이 됐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한 이듬해인 1790년, 그가 죽으며 남긴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이란 말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계몽군주였다.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합리적인 개혁을 추구하며, 전란에 의해 그 개혁이 좌절되지 않도록 평화를 염원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가장 낙후된 폐쇄국가에서 인민의 고혈을 빨면서 핵무기를 개발하는가 하면, 고모부를 대포로 쏴 처형하고 이복형을 중인환시리에 독살했으며 표류자를 바다에서 사살한 자를 ‘계몽군주’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21세기에 누가 누구를 ‘계몽’한다는 것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는 북한 인민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나? ‘계몽(enlightenment)’이란 것이 어두운 곳에서 불을 켜서 환히 밝힌다는 개념이라면, 애당초 그 불을 켜지 못하도록 스위치를 틀어쥐고 막은 것이 그들 일가(一家) 아니었나? 만약 그게 농담이었다면 아주 잠시 약간의 재미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