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딱딱한 느낌이 드시죠? 그러나 딱딱한 겉모습 뒤엔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도 많습니다. 종교가 가진 천(千)의 얼굴을 찾아가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까지 장례를 검소·간소하게 해도 되는 걸까, 싶었죠”

최근 만난 원택 스님의 말씀입니다. 2019년 2월 입적한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 장례 때 송광사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란 정도를 넘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방장(方丈)이라면 종합 수도원인 총림(叢林)의 최고 어른입니다. 그런데 영결식 영단(靈壇)엔 사진만 놓여있을 뿐 과일 등 일체의 고임새 없이 꽃꽂이 5개가 놓여 있었답니다. 심플함의 극치인 셈이지요. 그뿐 아니라 조의금, 조화도 일체 받지 않았고, 조문 오신 스님들께 ‘차비(車費)’도 드리지 않았답니다. 원택 스님은 “조의금과 조화를 사양하는 경우는 최근에 더러 있었지만 영단까지 그렇게 깔끔하게 마련하는 모습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원택 스님 “송광사 방장 스님 빈소 영단에 과일도 없어 깜짝 놀라”

지난 2019년 2월 입적한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의 빈소 모습. 보성 스님 사진과 꽃장식 외에는 과일과 떡 등 아무런 고임새 조차 없어 일반인들의 빈소 모습보다 간결하다. 당시 장례를 주관한 전 송광사 주지 진화 스님은 "군더더기와 치장을 싫어한 보성 스님의 생전 모습대로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송광사

알려진 대로 원택 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의 전설과도 같은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의 상좌(제자)입니다. 성철 스님 생전 20년 동안 바로 곁에서 모셨고, 입적 후 27년 동안 성철 스님을 현양하고 기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원택 스님은 평소 “저는 빚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스님이 언급한 ‘빚’이란 성철 스님 장례 때 이야기입니다. 1993년 11월 성철 스님 입적 후 다비식 땐 경남 합천 해인사 골짜기가 20만 인파가 꽉 찰 정도였습니다. 일반 신도가 이 정도였으니 스님들의 조문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상주의 입장에서 조문 오셨던 분이 상을 당하면 당연히 조문하는 것이 예의이지요. 그래서 원택 스님은 큰스님들이 입적하면 거의 예외 없이 조문하기 때문에 사찰 장례 문화의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의금, 조화 사양하고 조문객 차비도 없어지는 추세

생전의 성철(오른쪽 두번째) 스님과 제자인 원택(오른쪽 끝) 스님. 원택 스님은 스승 생전에 20년, 입적 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시고 기리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1993년 11월 성철 스님 영결식 모습. 성철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20만 인파가 해인사에 운집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그런 원택 스님의 눈에 최근 2~3년 사이 스님들의 장례가 ‘검소화’ 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고 합니다. 원택 스님은 2017년 12월 입적한 녹원 스님의 장례식 때 직지사가 공식적으로 조의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표한 것을 꼽았습니다. 녹원 스님은 직지사 주지를 7차례 연임했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 그리고 동국대 이사장을 15년간 역임한 분입니다. 당연히 조문객이 몰렸지만 직지사는 조의금과 조화를 사양했답니다.

이런 흐름은 이듬해인 2018년 3월 통도사 초우 스님 장례 때도 이어졌습니다. 원택 스님은 당시 통도사로 조문 갔다가 ‘여기가 상가(喪家) 맞나?’ 갸우뚱 했다고 합니다. 일견 쓸쓸하게 보일 정도로 빈소 입구엔 조화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조의금도 받지 않았고요. 원택 스님은 “빈소에 들어서자 비로소 ‘안심’이 됐다”고 했습니다. 영단에 과일, 떡, 꽃 등이 놓여있다는 얘기지요.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던 당시 통도사 주지 영배 스님께 “이렇게 바뀌어도 될까요” 물었더니 영배 스님은 “앞으로는 이렇게 바뀌어야지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연말 입적한 경북 문경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의 장례 때에도 조의금, 조화, 차비 모두 없었습니다.

지난 2019년 12월 적명 스님 영결식 모습. 영단엔 영정 사진과 꽃장식 외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조계종

법정 스님은 꽃상여 없이 평소 쓰던 평상에 누워 다비식

이에 앞서 지난 2010년 입적한 법정 스님의 장례가 있었지요. 법정 스님은 화려하게 꽃장식 된 상여 대신에 생전에 사용하던 평상 위에 입던 승복 차림 그대로 누워 ‘대종사(大宗師)’ 등 아무런 직함도 없이 ‘비구(比丘) 법정’ 단 네 글자만 남기고 떠났지요. ‘말빚 글빚 남기고 싶지 않다’며 펴낸 책들까지 모두 절판시켰던 스님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생전의 깔끔함 그대로였지요. 법정 스님의 장례는 사회적으로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불교계 오랜 골칫거리 ‘차비 문화’도 개선

사실 사찰의 장례 문화, 특히 ‘차비’ 문제는 오랫동안 불교계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사찰에서는 손님이 다녀갈 때 성의껏 차비를 드리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차비 문화도 시작은 좋은 뜻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취지는 옅어지고 형식만 남게 됐지요. 특히 이른바 ‘객승(客僧)’ 문제가 골칫거리였습니다. 객승은 제대로 승적(僧籍)을 갖췄는지 알기 어렵지만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사찰의 큰 행사에 나타나는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스님처럼 보이지만, 스님들 사이에선 정확한 정체를 알기 어려운 이들이지요. 문제는 이들이 행사가 끝난 뒤 ‘차비’를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같은 행사에서 2~3번씩 받아가기도 하고, 차비를 주지 않으면 줄 때까지 종무소 앞을 떠나지 않고 큰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많았지요. 특히 큰스님들의 장례 때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는 전체 장례 비용 중 절반 이상이 이른바 ‘차비’로 지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차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2000년대 초반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법장(1941~2005) 스님은 이 문제에 칼을 뽑았습니다. 전국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차비 금지’를 결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이후 사찰에서 서서히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사회가 변화하는 데 따른 불교계의 변화라는 측면도 있겠지요. 또한 불교계가 장례문화 검소화에 앞장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비식 후 사리 숫자세던 풍습도 점차 사라져

지난 2010년 3월 법정 스님의 법구가 다비장으로 옮겨지는 모습. '비구 법정'이란 네 글자만 씌여진 위패, 영정 사진 그리고 관이나 꽃상여 대신 평소 사용하던 평상에 누운 채 다비장으로 향했다. 당시 법정 스님의 간소한 장례는 사회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조선일보DB

큰스님들의 장례와 관련해 또다른 변화는 ‘사리(舍利)’ 숫자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는 점도 있습니다. 1993년 성철 스님 다비식이 끝난 후엔 사리(舍利)가 얼마나 나오는가에 관심이 쏠렸고, 이후로도 큰스님들의 다비식이 있으면 사리 수습이 관심사가 되곤 했지요. 마치 사리 숫자가 입적하신 스님의 깨달음의 척도처럼 여겨지던 분위기가 이제는 옅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어쨌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한 결과, 송광사 보성 스님 장례 때에는 조의금과 차비는 물론 영단의 과일까지 생략하는 파격이 가능했지요. 원택 스님은 보성 스님 장례를 ‘불교계 장례 검소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표현하며 “송광사가 왜 ‘승보(僧寶) 사찰’로 불리는지 진면목을 보여준 장례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송광사 전 주지 진화 스님 “검소하게 장례 치르니 모두 좋아하셨다”

2018년 당시 송광사 주지로서 보성 스님 장례를 주관한 진화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스님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사셨고 치장을 싫어하셨던 방장 스님을 살아온 모습 그대로 보내드리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성) 스님은 평생 손수 풀 뽑고 청소하며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삶을 본보이셨습니다. 문도들도 그런 뜻을 잘 알았기에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빈소와 영결식장은 그런 뜻을 받들어 간소하게 마련했습니다. 대신 조문 오신 모든 분들께 공양(식사)은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인근 마을의 식당들 어디서든 편하게 식사하시도록 했습니다. 비용은 절에서 부담하고요. 솔직히 차비를 못 드리는 점에 대해서 신경은 쓰였지만 결과적으로 문제 제기는 전혀 없었고 모든 분들이 흡족해 하셨습니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이른바 새로운 기준 ‘뉴 노멀’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된 스님들의 장례 검소화도 새로운 흐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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