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전북 익산의 두동교회 내부. 기역자로 꺾은 특이한 구조로 남녀 좌석을 구분해 서로 상대편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박종인 기자

10여년 전 종교지도자들의 대구·경북 지역 성지순례를 동행취재하다 영천의 자천교회를 방문했을 때 옛 예배당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1903년에 지어진 단층 직사각형 목조 예배당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판자 칸막이로 막은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남녀 좌석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알고보니 자천교회는 오히려 ‘신식(新式)’이었습니다. 적어도 같은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구조였으니까요.

경북 영천의 자천교회 문화재 예배당. 1903년 지어진 이 목조단층 건물 예배당 내부는 나무판으로 남녀 좌석을 구분했었다. /영천시

전북 김제의 금산교회와 익산의 두동교회는 아예 건물이 ‘기역(ㄱ)’자로 꺾여 있지요. 각각 남성과 여성이 앉아서 상대쪽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예배를 드리도록 설계된 것이지요. 물론 출입문도 각각 따로 나있습니다. 기역자가 꺾이는 꼭지점 자리에 강단이 자리해 목회자는 남성과 여성 좌석 양쪽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따로 또 같이’ 예배당인 셈입니다.

이 같은 예배당 구조는 20세기 초 개신교가 한국에 뿌리는 내리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종교였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죠. 개신교가 유교적 전통을 수용한 셈이지요. 그래서 예배는 함께 드리지만 이성(異性)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좌석을 구분한 것입니다. 금산교회와 두동교회는 자천교회보다 나중에 건축됐음에도 기역자로 꺾어서 지음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교회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들 교회들이 옛날 예배당을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100년 전 예배 풍경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부에 휘장-칸막이 설치해 남녀 신자석 분리

평양대부흥의 발원지인 장대현교회. 교인들 뒤로 보이는 큰 기와집이 기역자로 꺾여 있다. /조선일보DB

1907년 ‘평양대부흥’의 산실로 유명한 평양 장대현교회도 ‘기역자 예배당’이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언덕 위 높다란 웅장한 모습의 기와집으로 지어졌지만 역시 기역자로 꺾여있습니다. 당시 예배 모습을 촬영한 사진 중엔 여성 신자들이 빽빽하게 앉은 예배당 가운데에 외국인 목회자가 서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직각으로 꺾인 반대편엔 남성 신자들이 빽빽히 앉아 있었겠지요.

◇예배당에 남성용, 여성용 출입구 따로 만들기도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관습은 한꺼번에 없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북 의성 구천면의 구천교회에는 정면에 출입문이 두 개인 옛날 예배당이 있습니다. 현재는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이지요. 큰 교회나 성당의 정면에 출입문이 여러 개인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크지도 않은 건물에 앞뒤도 아니고 정면에 출입문을 두 개 둔 이유 역시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출입문 중 왼쪽은 남성용, 오른쪽은 여성용입니다. 음양오행설의 ‘남좌여우(男左女右)’을 따른 것이지요. 출입문을 따로 둘 정도이니 당연히 예배당 내부에서도 남녀 좌석은 구분됐지요. 새문안교회의 초기 예배 사진에도 예배당 중간에 휘장을 쳐 남녀 좌석을 구분한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교회에 와서는 엄마와 아빠가 각각 따로 떨어져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혼자 예배 드리기 어려운 아기들은 엄마 혹은 아빠 품에 안겨서 ‘예외’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경북 의성의 구천교회 옛 예배당.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하는 이 건물은 기역자로 꺾는 대신 정면 출입문을 두 개 만들었다. 왼쪽은 남성용, 오른쪽은 여성용. /구천교회
전북 완주의 되재성당. 6.25전쟁 때 소실된 건물을 복원한 이 성당 안에는 과거 남녀 좌석을 구분한 모습을 재현했다. /연합뉴스

◇천주교 봉쇄수도원 성당도 수도자석과 신자석 직각으로 꺾여 서로 안 보여

그런데 개신교만 ‘기역자 예배당’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에도 있습니다. ‘봉쇄수도원’의 성당이지요. 지난 2005년 경기 양평 글라라수도원 성당이 기억납니다. 글라라수도원은 봉쇄수도원입니다. 이 수도원에 입회한 수녀들은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수도원 내에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노동하면서 평생을 보냅니다. 봉쇄수도원에는 ‘봉쇄구역’과 ‘봉쇄선’이 있지요. 수도자와 외부인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이 선은 주교(主敎)라 해도 넘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일가 친척이 찾아와도 격자창을 사이에 두고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서 ‘기역자 예배당’과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역자 성당’은 아닙니다. 신자석에서 제대 방향으로 봤을 때 직각으로 꺾인 왼쪽 날개 부분에 수도자 좌석이 있었습니다. 수도자 좌석 앞에는 격자창이 쳐있지요. 이 성당 역시 직각으로 꺾이는 꼭지점 자리에 제대(祭臺)가 있어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양쪽을 다 볼 수 있지만 신자석에선 수도자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도와 성가(聖歌) 노래 소리만 들렸지요.

이탈리아 아시시 산타 키아라 성당의 미사 모습. 정면 제대의 오른쪽으로 수도자석이 있다. 신자석에서는 수녀들이 보이지 않고 기도와 노래 소리만 들린다. /김한수 기자

몇 년 전 이탈리아 아시시를 방문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시시는 알려진 대로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의 고향입니다. 언덕 위의 작은 도시 서쪽엔 성 프란치스코 성당, 동쪽엔 산타 키아라(글라라의 이탈리아식 발음) 성당이 있지요. 각각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를 기리는 성당입니다. 산타 키아라 성당의 새벽 미사 때였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 제대의 오른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일반 신자석에서 90도 꺾인 커튼 뒤에는 쇠창살이 쳐져 있고 수녀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역시 일반 신자석에서는 수녀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도록 돼있는 구조였습니다. 이윽고 미사가 끝날 무렵 궁금한 마음에 살짝 제대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커튼이 다시 드리워졌고 수녀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더군요. 그때 들었던 아름다운 성가의 선율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특히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성가 소리가 더욱 성스럽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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