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송광사가 매월 발행하는 사보(寺報) ‘송광사’ 2018년 5월호를 넘기다 눈길이 멈추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1930년대 송광사 경내 용화당 앞에 국민복 혹은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 네 명이 함께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런데 사진 속 소년들이 들고 있는 물건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트럼펫과 큰북 등이었습니다. 사진 뒷줄의 악기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 호른 혹은 유포니움 등으로 의견이 엇갈립니다. 공통된 점은 서양악기라는 것이지요. 어쨌든 한눈에 봐도 브라스밴드였습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 관장 고경 스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고경 스님도 “처음 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90년전 스토리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사진 속 동자승들은 1930년대 ‘송광사 브라스밴드’였답니다. 당시 송광사는 부처님오신날이나 생전예수재, 49재 등이 있으면 인근 마을까지 ‘공연’을 나갔다고 합니다.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는 살아 생전에 다음생에 받을 과보에 대해 미리 재(齊)를 지내는 의식입니다. 당시 송광사 스님들은 신식 서양악기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절에서 사용하던 나팔고동도 함께 불었답니다. 변변한 볼거리가 없던 시절, 송광사 밴드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저절로 짐작이 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진 속 뒷줄 왼쪽 흰색 윗도리를 입은 분은 정수 스님이랍니다. 이 분은 송광사가 학비를 부담해 일본 유학도 했답니다. 당시 쿄토에서 유학하던 스님은 다른 송광사 스님 한 분과 복식조로 학교 대항 연식정구대회에 나가서 지역 우승도 했답니다. 당시 상장을 촬영한 사진은 지금도 송광사에 보관돼 있답니다.
◇밴드하던 스님, 일제 학병 끌려가서도 군악대 소속이어서 살아남아
정수 스님은 유학 중 태평양전쟁에 징집돼 학병으로도 끌려갔다고 하지요. 당시 많은 학병들이 최일선으로 끌려가 전사(戰死)한 경우가 허다했지요. 그런데 정수 스님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송광사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환 비결이 바로 악기였답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어려서부터 송광사 브라스밴드로 활동한 덕분에 스님은 군악대에 배치돼 최전방이 아닌 본부 부대에서 지냈답니다. 그 덕에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죠.
◇동네 잔치에 출장 촬영가는 사진관 역할도
1930년대 송광사엔 브라스밴드뿐 아니라 연극 극단(?)도 있었답니다. 무대는 송광사 사자루(당시는 침계루), 내용은 ‘목련극’ 혹은 ‘팔상극’이었답니다. 목련극은 부처님 제자인 목련존자의 일대기, 팔상극은 부처님 일생을 정리한 연극이지요. 배우는 송광사 스님들이었고요. 학예회 수준의 연극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화승(畵僧)으로 유명한 일섭 스님이 무대 배경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까요. 송광사 인근 주민들은 브라스밴드 공연을 통해서 절에 큰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절에 와서는 연극 공연을 봤겠지요. 연극 대본도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브라스밴드 사진은 어떻게 촬영됐을까요. 카메라가 귀하던 당시 이런 스냅사진까지 어떻게 남았을까요. 고경 스님은 “당시 송광사 스님 중에 카메라를 가진 분이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 스님은 송광사에서 벌어지는 대소사는 물론 ‘출장 촬영’도 나갔다고 합니다. 인근 마을에 아이 돌잔치나 환갑잔치 등이 벌어지면 출장 나가서 기념촬영을 해주었다는 얘기이지요. 스님이 돌사진을 찍어준 아기가 자라서 송광사 스님이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한 마디로 90년 전 송광사는 순천 지역 최고의 신식 문화센터였던 셈이지요. 당시 스님들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포교에 활용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지요.
◇1930년대 송광사는 신식 문물 소개하는 문화센터
이들 사진을 수집하게 된 경위도 흥미로웠습니다. 고경 스님은 “1950~60년대 비구·대처 갈등이 심각했는데 송광사의 경우는 큰 충돌없이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습니다. 결혼한 스님들을 강제로 쫓아내지 않고 작은 말사(末寺)에서 살 수 있도록 했고, 이분들이 연세 들어 입적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는 이야기죠. 문제의 사진을 촬영한 스님도 결혼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브라스밴드 사진 등은 그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고요. 만약 송광사에서 결혼한 스님들을 강제로 내쫓았다면 후손들도 송광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사이가 원만했기에 선선히 사진을 기증하고 멋진 사진자료집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자료들이 온전히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모이게 된 것은 현 관장인 고경 스님이 25년간 박물관을 지켜온 덕분이지요. 고경 스님은 “가족이 돌아가셔서 송광사에 49재를 올리러 오는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습니다. 송광사에서 재를 올리러 오는 분들은 뭔가 송광사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유족들로부터 실마리 하나라도 들으면 거기서 연결해 수소문하고 학예사들이 직접 발로 뛰어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제 증언을 해줄 분들이 연로하셔서 시간이 많지 않다”며 “앞으로도 최대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성보박물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