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정사 입구의 대형 불두와 주지 해곡 스님.

금요일이던 지난 4일,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저 멀리 황금빛 부처님 얼굴이 보입니다. 높이 8짜리 거대한 불두(佛頭). 이곳에 들를 때마다 만나는 부처님이지만 매번 그 엄청난 크기, 눈 지긋이 감은 듯한 평화로운 표정은 참 인상적입니다.

◇연간 외국인 40만명이 찾는 곳

오늘 소개할 곳은 경기 용인 처인구에 있는 ‘와우정사(臥牛精舍)’입니다. 불교 열반종의 본산이지요.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 이 사찰은 일종의 ‘불교테마파크’입니다. 입구 안내판엔 ‘전체 순례 소요시간 1시간’이라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찬찬히 둘러보려면 1시간도 더 걸립니다. 입구엔 또다른 안내판이 있지요. ‘기와불사 3만원, 태국 신자 1000바트’. 실제로 경내 곳곳에 놓인 기와엔 태국어 등 외국어로 기원한 내용이 즐비합니다. 2020년초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진 최대 연간 40만명까지 외국인이 찾던 곳이 와우정사입니다. 작년까지는 봄가을 행락철이면 주차장이 대형 버스로 꽉 차던 곳입니다. 버스 탑승객은 주로 태국, 인도네시아, 중국 등 외국인이었지요.

이미 다녀오신 분들도 많겠지만, 이 사찰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찰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통 사찰들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가람 배치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와우정사는 제일 아래쪽에 ‘세계불교박물관’이 먼저 방문객을 맞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관람객 입장이 안 되지만 박물관엔 모래로 만든 불상, 쌀알로 만든 불상 등 희귀 불상들이 즐비합니다. 한 마디로 와우정사는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보다 보여주지 못하는 유물이 훨씬 더 많은 곳입니다.

◇인도 네팔 태국 불상이 즐비, 불전함엔 태국 지폐도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오늘은 여러 말씀보다 사진 위주로 와우정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경기 용인 와우정사 초입 풍경입니다. 저 멀리 거대한 불두가 방문객을 맞습니다. /김한수 기자
최근에 설치된 탄생불. 불두 앞 연못에 설치된 이 불상은 네팔에서 만들어 한국으로 옮겨왔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에서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건물은 세계불교박물관입니다.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휴관하고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네팔 부처님. 2년 전 주한 네팔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모아 네팔에서 만들어 와우정사에 세운 불상입니다. 와우정사는 국내 거주 외국 불자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김한수 기자
태국 부처님. 태국 왕실이 와우정사에 기증한 불상입니다. 높이 5.4미터, 무게 10톤에 이르는 큰 불상이어서 건물 내부가 아닌 야외에 지붕만 씌워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높이가 6미터에 이르는 큰 불상입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 계곡 옆의 탑. 국내에선 보기 드물게 돌과 기와를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 곳곳에선 태국어 등 외국어로 소원을 비는 사연을 적은 기와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의 기와불사 접수대 모습. 한국 돈과 태국 돈으로 접수하고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해곡 스님, 반세기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

외국인들이 먼저 찾는 곳 와우정사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주지 해곡(海谷·80) 스님의 반백년 노고가 있었습니다. 해곡 스님은 참 이색적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고향은 함경북도 나진입니다. 요즘 ‘나진선봉’이라고 유명한 곳이지요. 가족들은 해방 되자마자 월남해 부산에 정착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스님은 아홉살부터 절에 맡겨졌지요. 이후 스님은 KBS에서 정년퇴직한 1998년까지 반승반속(半僧半俗)의 ‘2중생활’을 했습니다. 낮엔 방송국 직원으로, 밤엔 스님으로 살았지요.

스님은 ‘중간자의 삶’을 십분 활용한 경우입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조계종 기획위원으로도 오래 일하면서 막후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과정입니다. 그뿐 아니라 1970년대 여의도광장(당시는 5·16광장)에서 연등회를 개최하도록 주선하고 TV생중계를 성사시킨 과정 등에도 해곡 스님은 막후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지난 반세기 한국 불교사는 해곡 스님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해곡 스님이 특정 불교 종단에 소속되지 않고 ‘반(半)자유인’으로 지냈기에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외국과 교류가 어렵던 시절, 외국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그 네트워크는 현재의 와우정사를 이루게 된 밑거름이 됐습니다.

해곡 스님은 1970년대부터 다양한 인연으로 만나는 외국인들을 통해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물론 시작은 미약했지요. 작은 불상 하나, 작은 문서 한 장부터였지요. 그러나 인연이 이어지면서 자료를 제공한 분들은 감동했지요. 없어졌을 줄 알았던 자료가 해곡 스님에게 건네지면 그대로 잘 남아있었거든요. 해곡 스님은 지금도 연말이면 이메일로 인사를 나누는 불교계 인사가 20여개국에 400여명에 이릅니다.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자료 수집의 규모가 점점 커진 것이지요. 작은 불상은 큰 불상이 됐고, 기념품점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가 골동상에서 큰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자료로 발전했지요.

와우정사 주지 해곡 스님은 길고양이 20여마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곳곳에 물과 사료를 담은 통이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는 최근 네팔 불교계를 통해 티베트 대장경을 입수했습니다. 와우정사는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남방 불교의 대장경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와우정사는 디테일이 강합니다. 어르신 방문객이 많은 것을 고려해 남자화장실엔 지팡이 거치대도 있습니다. /김한수 기자

지난 2018년 4월, 와우정사를 찾았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날은 주한 네팔인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네팔에서 만든 불상을 와우정사에 봉안하는 날이었습니다. 높이 2.8미터짜리 청동불상을 만들기 위해 국내 체류 4만 네팔인 가운데 400여명이 주머니를 열었습니다. 그 중에는 네팔인도 식당을 운영하는 분도 있었지만, 청바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정성을 보탰습니다. 그날은 그분들이 모였지요. 한마디로 몇몇 국가 출신 외국인에게 와우정사는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고향에 가기 어려울 때에는 와우정사를 찾아 향수(鄕愁)를 달내고 있는 것이지요. 코로나 와중이던 올해도 네팔인들은 다시 뜻을 모았습니다. 최근 와우정사 입구 불두(佛頭) 앞 연못에 설치된 부처님 탄생상입니다.

해곡 스님은 올해 만 80세의 고령이지만 정정합니다. 기억력도 연도와 날짜까지 기억할 정도로 또렷합니다. 지난주 해곡 스님의 안내에 따라 와우정사 경내를 1시간 정도 순례해보니 비결을 알 수 있더군요. 해발 300 남짓한 계곡을 매일 3~4차례 오른다고 했습니다. 거의 꼭대기에 있는 ‘대각전’ 앞엔 물그릇과 사료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료 봉지를 거꾸로 들어 사료 그릇에 가득 채웠습니다. 스님과 와우정사를 순례하는 동안 애꾸눈 고양이 한 마리가 계속 동행했습니다. 양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였던 길고양이를 스님이 거둬 키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거둔 고양이가 거의 스무 마리쯤 된다고 합니다.

◇해곡 스님 소원 “한자리에 잘 보존됐으면”

스님의 소원은 평생 수집한 유물이 제 주인을 찾아 정리되고 제대로 보여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수집한 중국과 일본의 대장경에 이어 티베트 대장경도 최근에 입수했습니다. 네팔 스님들을 통해 입수한 자료입니다. 그 외에도 영어, 팔리어 대장경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부족해 방문객들에게 다 공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평생에 걸쳐 특정 분야를 수집해온 분들의 공통적 소망이기도 하지요. 취재 과정에선 이런 분들의 열정을 우리 사회가 미처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부디 해곡 스님의 평생에 걸친 정성과 열정이 온축된 와우정사가 앞으로도 국내외에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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