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 동안 시화첩을 꺼내볼 때마다 ‘이건 꿈이고, 기적이야’ 생각했습니다. 이젠 영구히 잘 보관할 곳으로 보내드려야지요.”
지난 20일 오후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장욱진 화백의 30주기 기념전이 열리는 현장. BTN 불교TV 회장 성우 스님은 시화첩 ‘금가락지’를 장 화백의 장녀 장경수씨에게 건넸다. 경기 양주 장욱진미술관에 기증한 것.
이 시화첩은 1980년 성우 스님의 시 31편에 장욱진 화백 그림 14점과 중국 산수화 등을 목판에 새겨 인쇄한 것. 성우 스님은 등단한 시조시인. 불교 선(禪)의 세계를 시어에 담아낸 작품으로 잘 알려졌다. 시화첩이 만들어진 사연은 한 편의 동화를 방불케 한다. 인연의 시작은 1979년 여름 경기 파주 보광사. 이 사찰에 머물던 정현 스님이 누각에서 성우 스님의 시를 목판에 새기는 것을 본 한 노인이 유심히 살피다 물었다. “나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내 그림도 끼워줄 수 있겠소?” 노인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은 정현 스님은 즉시 대구 파계사에 있던 성우 스님에게 편지를 띄웠다. 성우 스님은 “편지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침 장 화백의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를 읽고 막연히 장 화백을 흠모하던 차였다. 주변 미술인에게 물었더니 ‘그분은 최고 화가다. 도인(道人)이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정현 스님의 전갈을 받은 성우 스님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명륜동 장 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장 화백은 아내에게 “그림 다 가져오라”고 하곤 초면의 스님들에게 “마음껏 골라보시라”고 했다. 조심스레 대여섯 점을 골랐더니 “더 고르시라”고 권했다. 결국 14점을 골라온 스님들은 서로 “그림 한 점이 집 한 채 값이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장 화백의 작품을 모본으로 정현 스님은 목판화를 제작했다. 훗날 화성 용주사 주지를 지낸 정현 스님은 ‘날마다 좋은날'이란 주제의 선화(禪畵) 보급운동을 펼친 화가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시화첩이 완성된 것은 이듬해인 1980년 연초. 성우 스님 10부, 장 화백 10부, 정현 스님과 글씨를 쓴 김화수씨 10부 등 도합 30부만 제작했다. 성우 스님은 연초에 원화 14점과 시화첩 10부를 들고 장 화백 자택을 다시 찾았다. 시화첩을 받아든 장 화백은 “잠깐 2층에 올라가자”고 했다. 2층엔 금강경을 쓴 병풍이 둘러쳐 있고, 방 가운데에는 불경을 올려 놓고 읽는 경상(經床) 하나만 놓여있는 심플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장 화백은 스님에게 “우리 가족을 위해 금강경 한 번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성우 스님은 “거기서 금강경을 읽어드리고 내려왔다.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
40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시화첩을 기증하게 된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 덕분이었다. 지난해 12월 27일은 장 화백의 30주기 기일. 예년엔 집에 모여 제사를 지냈지만 코로나 때문에 여러 가족이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족 네 명만 BTN 불교TV 법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법당에 우연히 성우 스님이 들른 것. 성우 스님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매일 출근하지는 않는데, 그날따라 사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법당에서 장 화백 가족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시화첩 이야기가 나왔고 스님은 선뜻 기증 의사를 밝힌 것. 10부씩 나눴지만 장 화백 유족들에겐 이 시화첩이 없었다. 스님도 9부는 주변에 나눠주고 단 한 부만 본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 소장본을 내놓은 것.
섭섭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성우 스님은 “무슨 말씀,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고 스무살 이상 연하 젊은 스님의 시화첩에 자신의 그림을 선뜻 사용하도록 허락한 장 화백이나 40년 간직한 시화첩을 조건 없이 기증한 스님이나 군더더기란 없었다.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을 주제로 52점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장욱진 30주기 기념전은 2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성우 스님이 기증한 시화첩은 2층 한 코너 유리진열장 안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전시가 끝난 후엔 경기 양주 장욱진미술관으로 옮겨 소장된다.
☞장욱진(1917~1990)
충남 연기 출생으로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6년간의 짧은 서울대 미대 교수 생활 후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군더더기를 모두 생략하고 최소한의 선(線)과 형상만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박수근·이중섭·김환기와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을 개척했으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