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0일 서울 삼청동 현대화랑. 성우 스님(오른쪽)이 자신의 시에 장욱진 화백 그림을 붙인 시화첩을 딸 장경수씨를 통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날 성우 스님이 "장 화백이 그림을 마음껏 고르라고 하시더라"고 하자 장씨는 "그때 그림 다 갖겠다 하시지 그랬냐"며 웃었다. /김지호 기자

“지난 40년 동안 시화첩을 꺼내볼 때마다 ‘이건 꿈이고, 기적이야’ 생각했습니다. 이젠 영구히 잘 보관할 곳으로 보내드려야지요.”

지난 20일 오후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 장욱진 화백의 30주기 기념전이 열리는 현장. BTN 불교TV 회장 성우 스님은 시화첩 ‘금가락지’를 장 화백의 장녀 장경수씨에게 건넸다. 경기 양주 장욱진미술관에 기증한 것.

서울 명륜동에 살던 시절(1975~1980)의 장욱진 화백. 장 화백은 초면의 젊은 성우 스님의 시화첩에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그림을 사용하라고 했다. /현대화랑

이 시화첩은 1980년 성우 스님의 시 31편에 장욱진 화백 그림 14점과 중국 산수화 등을 목판에 새겨 인쇄한 것. 성우 스님은 등단한 시조시인. 불교 선(禪)의 세계를 시어에 담아낸 작품으로 잘 알려졌다. 시화첩이 만들어진 사연은 한 편의 동화를 방불케 한다. 인연의 시작은 1979년 여름 경기 파주 보광사. 이 사찰에 머물던 정현 스님이 누각에서 성우 스님의 시를 목판에 새기는 것을 본 한 노인이 유심히 살피다 물었다. “나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내 그림도 끼워줄 수 있겠소?” 노인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은 정현 스님은 즉시 대구 파계사에 있던 성우 스님에게 편지를 띄웠다. 성우 스님은 “편지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침 장 화백의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를 읽고 막연히 장 화백을 흠모하던 차였다. 주변 미술인에게 물었더니 ‘그분은 최고 화가다. 도인(道人)이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성우 스님의 시화첩 중 '원단에'. 오른쪽 페이지엔 성우 스님의 시, 왼쪽 페이지엔 장욱진 화백의 그림이 새겨졌다. /김한수 기자

정현 스님의 전갈을 받은 성우 스님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명륜동 장 화백의 자택을 찾았다. 장 화백은 아내에게 “그림 다 가져오라”고 하곤 초면의 스님들에게 “마음껏 골라보시라”고 했다. 조심스레 대여섯 점을 골랐더니 “더 고르시라”고 권했다. 결국 14점을 골라온 스님들은 서로 “그림 한 점이 집 한 채 값이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장 화백의 작품을 모본으로 정현 스님은 목판화를 제작했다. 훗날 화성 용주사 주지를 지낸 정현 스님은 ‘날마다 좋은날'이란 주제의 선화(禪畵) 보급운동을 펼친 화가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장욱진 화백의 대표작 '자화상'. 6.25 전쟁 중 고향 충남 연기로 피란 갔던 당시 그린 작품이다. 이번 기념전에 선보이고 있다. /현대화랑
장욱진 화백의 1978년작 '가로수'. /현대화랑

시화첩이 완성된 것은 이듬해인 1980년 연초. 성우 스님 10부, 장 화백 10부, 정현 스님과 글씨를 쓴 김화수씨 10부 등 도합 30부만 제작했다. 성우 스님은 연초에 원화 14점과 시화첩 10부를 들고 장 화백 자택을 다시 찾았다. 시화첩을 받아든 장 화백은 “잠깐 2층에 올라가자”고 했다. 2층엔 금강경을 쓴 병풍이 둘러쳐 있고, 방 가운데에는 불경을 올려 놓고 읽는 경상(經床) 하나만 놓여있는 심플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장 화백은 스님에게 “우리 가족을 위해 금강경 한 번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성우 스님은 “거기서 금강경을 읽어드리고 내려왔다.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

장욱진 화백의 1989년 작품 ‘황톳길’. 가족과 집,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다.(위) 성우 스님의 시 ‘공양’에 장 화백의 작품이 함께 실린 시화첩의 한 부분(가운데)과 성우 스님이 장 화백의 딸 장경수씨와 시화첩을 펴고 이야기 나누는 모습. /현대화랑·김지호 기자

40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시화첩을 기증하게 된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 덕분이었다. 지난해 12월 27일은 장 화백의 30주기 기일. 예년엔 집에 모여 제사를 지냈지만 코로나 때문에 여러 가족이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족 네 명만 BTN 불교TV 법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 법당에 우연히 성우 스님이 들른 것. 성우 스님은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매일 출근하지는 않는데, 그날따라 사무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법당에서 장 화백 가족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시화첩 이야기가 나왔고 스님은 선뜻 기증 의사를 밝힌 것. 10부씩 나눴지만 장 화백 유족들에겐 이 시화첩이 없었다. 스님도 9부는 주변에 나눠주고 단 한 부만 본인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 소장본을 내놓은 것.

섭섭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성우 스님은 “무슨 말씀,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고 스무살 이상 연하 젊은 스님의 시화첩에 자신의 그림을 선뜻 사용하도록 허락한 장 화백이나 40년 간직한 시화첩을 조건 없이 기증한 스님이나 군더더기란 없었다.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을 주제로 52점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장욱진 30주기 기념전은 2월 28일까지 계속된다. 성우 스님이 기증한 시화첩은 2층 한 코너 유리진열장 안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전시가 끝난 후엔 경기 양주 장욱진미술관으로 옮겨 소장된다.

장욱진(1917~1990) 충남 연기 출생으로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6년간의 짧은 서울대 미대 교수 생활 후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장욱진(1917~1990)

충남 연기 출생으로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6년간의 짧은 서울대 미대 교수 생활 후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군더더기를 모두 생략하고 최소한의 선(線)과 형상만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박수근·이중섭·김환기와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을 개척했으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