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신교 주간지를 들추다 눈에 띄는 칼럼을 발견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측 교단지 ‘한국기독공보’에 실린 정훈 목사(전남 여수 여천교회)의 칼럼이었습니다. ‘목사 청빙에 대하여’란 제목의 칼럼은 현재 한국 개신교계의 목사 청빙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칼럼의 요지는 요즘 교회들의 새 담임목사 청빙 과정이 요식화되고 있다는 우려입니다. “어렸을 적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갑자기 교인들이 술렁대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했는데 틀림없이 우리 목사님 스카우트(?) 하려고 오신 타 교회 장로님들이 분명하다는 말들이다.” 정 목사님이 이야기한 옛날 ‘스카우트(청빙) 풍경’은 그랬습니다. 교회 목회자가 공석이 되면 장로님들이 목회 잘한다고 소문난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 예배 분위기도 보고, 설교도 들어본 후 그 목사님에게 자신들의 교회로 와달라고 간곡히 청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실랑이가 벌어지지요. “담임하는 교회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목사님과 “좀더 큰 교회에서 마음껏 목회의 나래를 펼치시라”는 장로들의 설득이 팽팽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님이 옮기기로 결정하면 이임하는 날은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고 합니다. 정 목사님은 “그랬기에 한국 교회 강단은 뜨거웠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 풍경은 ‘이력서 보고 뽑기’로 바뀌었다는 거지요. 1차 서류 심사에서 ‘박사’가 아니면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중대형 이상 규모 교회의 이야기겠지요. 문제는 이력서 어디에도 ‘영성(靈性)’을 기록하는 칸이 없답니다. 정 목사님은 “설교는 학벌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무릎으로 하는 것”이라며 “제출 서류 어디에 기도칸이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는 이어 “목사는 행정가, 경영자가 아니라 보냄 받은 곳에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들이어야 한다. 세상 지식은 부족해도 기도하는 낙타 무릎이 자랑이 되어야 하고 가시 같은 성도들이 아프게 찔러대도 사랑으로 품에 안고 인내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서류만 보고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질타했습니다.
개신교계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목사 청빙’의 풍경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정 목사님의 이야기처럼 소형 교회중형 교회대형 교회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회 목회자가 은퇴할 때가 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갈 땐 장로님들이 보다 작은 규모의 교회를 찾아가 예배 분위기를 살펴보고, 설교를 들어보고 정중히 ‘청빙’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주일 예배 출석 교인이 1만명을 넘는 교회가 속속 등장하면서 ‘청빙의 풍경’도 바뀌었습니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 같은 현상이 벌어졌지요. 1970~80년대 급성장한 서울과 수도권의 교회들은 200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담임목사 교체기에 접어들었지요. 이때 등장한 ‘새 풍경’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목회자를 청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트렌드는 국내 신학교 교수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대체로 미국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와 우리나라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비슷해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들어 국내 교회에서 벌어진 변화 중의 하나는 이른바 ‘이력서 청빙’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단지와 신학교 게시판엔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부목사·전도사를 청빙하는 광고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특히 담임목사를 희망하는 목사들은 이력서를 작성해 각 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 무렵부터 알게 모르게 유명 목회자의 친인척, 유력 장로의 친인척, 해외 신학대학과 일반 대학의 학위가 ‘우대’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력서 기재 사항을 놓고 서류 심사를 하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게다가 2000년대 초반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세가 가장 정점을 찍었을 때였지요. 한때 인가·비인가 신학교에서 1년에 2000~3000명씩 목사후보생이 배출되며 목회자의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응시’를 위해서 ‘설교 테이프’ ‘목회 계획서’를 준비하고, 여유가 되면 해외 유학 등 ‘스펙’을 갖추는 것이 일반화됐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무렵부터 ‘교회의 빈익빈부익부’도 심화됐다고 합니다. 농어촌과 낙도오지 등에선 목회자가 태부족하고, 도시의 중대형 교회엔 부목사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는 거죠. 이런 분위기가 20년 가까이 이어지다 보니 정훈 목사님이 지적한 ‘이력서 청빙’이 일반적인 현상이 된 것입니다. 세상 변화에 교회도 맞춘 셈이지요.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정훈 목사님이 지적한 점입니다. 저는 정훈 목사님 칼럼을 읽으면서 돌아가신 방지일(1911~2014) 목사님과 인터뷰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27세~48세 청년 시절 중국 선교사로 파송돼 공산화된 중국에서 고초를 겪다가 귀국해 영등포교회에서 21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한 한국 개신교의 ‘산 역사’였습니다. 방 목사님이 인터뷰 내내 거듭 강조한 단어는 ‘구령(救靈)’이었습니다. ‘영혼 구원’이란 뜻이지요. 당시 인터뷰 질문 중에 ‘한국 교회의 위기’를 여쭤본 적 있는데 방 목사님은 “무엇이 걱정이냐. 교회의 본질은 속죄구령(續罪救靈)”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서울 내수동교회를 23년간 담임한 박희천 목사님도 기억납니다. 박 목사님은 당시 500명 정도 되는 모든 교인의 이름과 인적사항, 가족사항까지 꿰셨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다음날 예배에 참석할 교인들의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면서 외웠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교인이 임종하면 집에 찾아가서 염습까지 다 했답니다. 염습을 할 때면 고인들의 변이 흐르는 경우도 있었다지요. 인터뷰 당시 곁에 계시던 사모님은 “여성 교인은 제가 염습했어요. 그땐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았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했습니다. 2015년 통계로는 불교보다 신도가 많은 것으로 조사돼 한국 제1의 종교로 부상했지요. 그렇지만 ‘제1 종교’로서 느끼는 자부심과 책임감은 그에 걸맞는지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있습니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찾는 지름길은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 회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 구직자들처럼 이력서의 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교인들의 영혼을 구원을 하려는 열정이 있는지가 청빙의 기준이 돼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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