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에서 걸어서 5분 대대마을
오늘은 전남 순천 대대(大垈)마을의 대대교회 공학섭(66) 목사님이 쓴 ‘대대마을 골목이야기’라는 책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지 ‘기독신문’에서 이 책 이야기를 읽고 공 목사님께 부탁드려 받아 읽게 된 책입니다. 대대마을은 갈대로 유명한 순천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약 200가구에 주민 1000명이 채 안되는 작은 마을이랍니다. ‘대대’라는 마을 이름 때문에 ‘대대교회 목사’라고 하면 ‘어느 부대 목사냐?’는 물음이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책의 전체적 인상은 ‘포근함’과 ‘따뜻함’입니다. 1부 ‘대대마을 골목이야기’, 2부 ‘대대마을 신문화 이야기’, 3부 ‘대대마을 생태이야기’로 구성됐는데요, 1988년 대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34년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공 목사님이 마을 어른들에게 틈틈이 들은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한 것들입니다.
◇“시간은 기억을 훔쳐가기 마련” 마을 이야기를 쓰다
공 목사님은 서문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사는 대대마을은 대략 500년 정도 역사를 지니고 있다. 70~80년 살다가는 한 사람의 생애 속에도 한 권의 책으로도 담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중략)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해도 시간은 기억을 훔쳐가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어른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틈틈이 붓 가는 대로 기록해 두었다.”
‘시간은 기억을 훔쳐가기 마련’이란 구절이 내내 귓가에 맴돕니다. 구전(口傳)되는 이야기를 채집했기 때문에 책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이름은 많이 등장하는 데 비해 정확한 연도 표기는 거의 없다는 점이지요. 그렇지만 뭐 어떻습니까. 역사책이 아니라 이야기인데요.
우선 ‘골목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돌틈’ ‘불무골’ ‘골가실’ ‘새 뜸’ ‘동편 몬당’ ‘통샘’ ‘골 뜸’ ‘서편 구렁’ 등 외지인들은 그 뜻을 짐작하기도 쉽지 않은 골목 이름들이 정겹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이 너나 없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길을 넓혀 드리겠다”고 공약하는 골목들이랍니다. 그렇지만 공 목사님과 마을 주민들은 이 좁은 골목길을 더 사랑한다고 하지요. ‘서편 종점’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포 종점’보다 유명하다고 하지요. 게다가 이 작은 골목길엔 나무 명패가 붙어있습니다. 2010년 여름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 9개국 청년들이 마을을 방문해 교회에서 보름 정도 머문 적이 있는데, 당시 마을 청년들과 함께 골목을 찾아다니며 명패를 붙였답니다.
◇잘 때도 넥타이 풀지 않았던 목사님 이야기
2부는 교회가 마을의 근대화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대대교회의 시작은 ‘확장주일학교’였다네요. 저도 ‘확장주일학교’라는 단어는 이 책에서 처음 봤습니다. 1926년 순천선교부 주도로 순천 매산학교 여학생 2명, 남학생 1명이 한 조가 되어 주일마다 마을을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 것이 ‘확장주일학교’랍니다. 그러니까 대대교회는 어른이 아닌 어린이들로부터 시작됐다는 뜻이지요. 그에 앞서 매산학교 교장을 지낸 엉거(Unger) 선교사가 먼저 대대마을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교회는 건물 없이 청주 한씨 댁 마당, 김해 김씨 제각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서사례라는 여인이 온몸을 던져 7년 이상 교회를 지켰고, 어린이들이 낸 연봇돈을 모아 예배당 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엔 드디어 정식으로 목회자를 청빙했답니다. 초대 담임은 서재신 목사님이었는데, 이분은 여순사건 이후 마을을 구했다고 하지요. 진압군이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려 할 때 서 목사님이 나서서 “이 중엔 아무도 공산당에 부역한 사람이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부역한 사람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고발하지 않고 모른 척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을을 구한 서 목사님은 잘 때에도 넥타이를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언제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였답니다.
교회는 6·25 이후엔 마을회관에서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중학교 과정을 개설하는 등 마을의 근대화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중학교는커녕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든 어렵던 시절에 교회가 학교를 열었으니 주민들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워했을까요. 최근까지도 교회는 한글학교, 노인대학 등을 열고 경로당 부지를 제공하고, 환경운동에도 앞장서면서 마을 주민들을 돕고 있답니다. 1998년엔 교회에서 ‘순천만 생태계 보전을 위한 국제심포지엄’도 개최했다고 합니다. 시골 마을교회로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출한 목사만 30여명. “춘천에 박사 마을이 있다면 순천엔 목사 마을이 있다”
이런 믿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서인지 대대마을 출신 목사가 3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큰 교단의 교단장을 지낸 분들도 있다고 하지요. 공 목사님은 책에서 “강원도 춘천 서면에 ‘박사 마을’이 있다면, 순천에는 ‘목사 마을’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공 목사님의 마을 사랑은 ’500살 된 할아버지 팽나무' ‘기품 있는 회화나무’ ’60살 먹은 교회 종'까지 이어집니다.
◇순천만 방문은 이른 아침, 문학관쪽으로 걷는 게 최고
3부는 걸어서 5분 거리인 순천만 생태환경 이야기입니다. 사진만 봐도 속이 뻥 뚫리듯 상쾌해지지만 공 목사님은 방문객들을 위한 깨알 같은 팁을 제공합니다. 가령 순천만은 새벽 혹은 이른 아침 풍경이 최고인데 이 시간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공 목사님은 “입장 시간 이전에는 순천만문학관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문학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아무 때나 문을 열어 둔다. 문학관 가는 길만 걸어도 순천만의 새벽을 누리는데 큰 지장이 없다”고 일러줍니다. 또 ‘낮시간에 순천만을 호젓하게 누리는 방법’으론 “주말은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비오는 날이면 언제든 좋다. 비오는 날은 방문객이 적기 때문에 순천만의 자연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현지에 사는 주민만 알 수 있는 기밀(?)이지요.
◇“시골 마을 교회 목사님들이 마을 이야기 많이 썼으면”
책을 읽고나서 공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남 장성 출신인 공 목사님은 대대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 대대마을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네요.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 대대교회 교인들이 살짝 찾아와 미리 ‘선을 본’ 다음 조용히 청빙했답니다. 1996년 교회 70년사를 정리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에 눈 떴고, 마을 역사를 정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고 하네요. 공 목사님은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다 역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작은 마을 교회 목사님들이 마을 역사를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은 기본적으로 매주 설교를 하기 때문에 글 쓰는 훈련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묻히고 잊히는 마을 역사를 목사님들이 기록한다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과 통화를 끝내고 든 생각은 ‘부자’였습니다. 공 목사님이라고 왜 큰 도시에서 큰 교회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작은 마을에서 골목 하나까지 정을 주면서 마을을 위해 애쓰는 공 목사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마포 종점’을 부러워하지 않듯이 목사님도 대도시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순천만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이런 마을이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줄은 몰랐네요. 다음번에 순천만에 갈 때에는 대대마을을 찾아 골목 구석구석을 걸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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