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별사랑씨의 무대를 보면서 정말 악착같다고 느꼈습니다. 한편으론 안쓰럽고 측은했어요. 그런데 별사랑씨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멋진 가수예요. 이젠 악착같지 않아도 되겠어요.”
지난 3월 4일 밤. ‘미스트롯2’ 결승전에 오른 톱7 중 마지막 순서로 별사랑이 나훈아의 ‘공’을 편안하게 부르자 마스터(심사위원) 박선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결승 무대까지 장식한 별사랑에 대한 찬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문득 ‘악착’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경북 청도 운문사 비로전 천장에 매달린 ‘악착보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운문사 대웅전엔 반야용선에 줄로 매달린 동자상이 있는데, 이 동자상 이름이 바로 악착보살입니다. 저도 비구니 명법스님의 책에서 읽기 전까진 ‘악착보살’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명법 스님이 2014년 저서 ‘미술관에 간 붓다’에서 소개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극락정토로 사람들을 싣고 갈 반야용선이 출발한 직후에 악착보살이 나루터에 도착했습니다. 지각생이지요. 이미 배는 떠나고 있는데 마침 밧줄 하나가 보입니다. 악착보살은 죽기 살기로 그 밧줄에 매달렸지요. 그 덕분에 마침내 정토에 닿았다는 게 불교 설화의 내용입니다.
악착보살은 서울 봉천동 길상사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운문사와 달리 길상사는 1980년대 주택가에 창건된 현대 사찰입니다. 길상사 법당 천장에도 악착보살이 있습니다. 길상사 정위 스님은 “절을 새로 창건해 법당을 만들 때 골동품점에서 반야용선을 발견했다. 악착보살은 없는 상태였다. 아마도 폐사(廢寺) 된 절에서 나온 것 아닌가 싶었다. 나무로 된 반야용선에 줄을 매달고 그 줄에 목각으로 만든 동자상(악착보살)을 붙였다”고 말했습니다. 길상사 악착보살의 특징은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자의 다급한 마음을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동아줄에 매달린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운문사와 길상사의 악착보살은 차츰 알려지면서 법당의 명물이 됐습니다.
악착보살을 생각하니 불교에서 출발했지만 일상에서 쓰이는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으로 ‘아귀’ ‘이판사판’ ‘야단법석’ ‘찰나’ ‘영겁’ ‘화두’ ‘다반사’ 등이 있지요.
‘아귀처럼 먹는다’고 할 때 ‘아귀(餓鬼)’도 불교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탐욕을 부리다 배는 엄청나게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해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귀신이랍니다. ‘이판사판’은 흔히 ‘사판’의 ‘사’를 ‘死’로 생각해 ‘이판사판, 죽을 판’ 등으로 쓰곤 하지요. 하지만 이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이 원래 표기입니다. 여기서 이판은 참선수행하는 스님, 사판은 행정을 보는 스님을 가리키지요. 따라서 ‘이판사판’이라고 하면 ‘모든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야단법석도 한자로는 ‘야단법석(野壇法席)’입니다. 일반적으론 사찰 법당 실내에서 법회를 하는데, 때로는 야외에서 단을 펴고 법을 펼치는 법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원래는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說)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당시 부처님 법문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산인해를 이뤘겠지요. 그래서 시끄럽고 어지러운 상황을 일컫는 표현으로 굳어진 듯합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야단났다’ ‘법석을 떤다’ 등 ‘야단’과 ‘법석’을 떼어내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반사’ 역시 대부분 ‘다’자를 ‘多’로 여겨 ‘많은 일’ ‘흔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다반사는 한자로 ‘다반사(茶飯事)’입니다. 문자 그대로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입니다. 예사로운 일이라는 뜻이지요. 사찰에서 차를 많이 마시는 풍경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이번에 불교 용어와 관련해 취재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원철 스님이 일러준 표현인데요, ‘횡설수설(橫說竪說)’과 ‘자비량(自費量)’입니다.
‘횡설수설’이라면 흔히 ‘헛소리’쯤으로 생각하지요. 앞에 ‘술 취해서’ 등의 수식이 붙곤 하지요. 그런데 원철 스님이 일러준 원뜻은 ‘무불통지(無不通知)’ 즉 만물박사에 가깝습니다. 불교 경전을 가로로도, 세로로도 다 외면서 그 뜻을 설법한다는 뜻이랍니다. 옛날 한문경전은 세로쓰기를 했습니다. 수설이죠, 세로로 한 줄 한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처럼 가로로 읽으면서 상하로 한 줄씩 읽어내린다면 모르는 사람이 들었을 때 그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횡설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서 읽는 사람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불교 농담 중에 ‘팔만대장경을 가로 세로 앞으로 뒤로 읊는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뜻인 셈이지요.
‘자비량’ 역시 불교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과거 스님들이 강원(講院)이나 선원(禪院)에 갈 때에 자기가 먹을 양식과 이부자리, 옷가지 등을 직접 장만해서 해당 사찰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자비량’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량’을 양식 즉 ‘糧’으로 표기했다고 하고요. 흥미로운 것은 지금은 ‘자비량’이란 단어는 불교에선 거의 쓰지 않고 오히려 개신교에서 많이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불교에서는 선원에서 동안거·하안거를 할 때 자기 식량을 싸가지 않습니다. 수행하는 데 드는 비용은 해당 사찰에서 지원하고 오히려 동안거·하안거가 끝날 때 해제비를 스님들에게 나눠주지요.
반면 개신교에서 ‘자비량’은 주로 선교사의 파송 형태를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대다수 선교사들은 선교단체와 교회로부터 비용을 지원받곤 합니다. 이에 반해 본인 비용으로 선교하는 분들을 ‘자비량 선교사’라고 부르지요.
불교가 한국에 전래된 지 1600년이 지나는 동안에 불교 용어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과 이웃 종교의 용어까지 스며들어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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