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소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진(女眞)은 실존 인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소설 속 묘사와는 달리 이순신 장군과 여진이 동침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순신 연구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난중일기’의 용어·인명 400여 곳을 고증해 21일 출간한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도서출판 여해)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노 소장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1602년 해남 윤씨 집안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서 ‘비(婢·여자 종)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가문의 사비(私婢)였던 여진은 전란 중에 죽었다는 소설 속 설정과는 달리 임진왜란 종전 4년 뒤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모두 11남매를 낳았다고 기록됐다.
이 여진이 난중일기 속 여진이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난중일기’에 기록된 노비의 이름은 여진을 제외하고 옥이(玉伊), 옥지(玉只), 갓동, 덕금(德今), 한대(漢代), 춘화(春花) 등 모두 6명인데, 이 6명의 이름이 모두 해남 윤씨 분재기에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1577년 해남 윤씨 집안에서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의 전답을 매입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지역의 유력자였던 이 가문에서 인연이 있던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노비 인력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진은 ‘난중일기’ 1596년(병신년) 9월 12·14·15일에 세 차례 기록됐지만 인명인지 종족 이름인 여진족인지 불분명했다. 김훈은 지난해 본지 통화에서 “‘난중일기'의 해당 부분을 읽고 여진이 사대부 여인은 아닌 것으로 보아, 천한 신분의 여성으로 설정해 도입부에 등장시켰다”고 말했다.
당시 이순신은 전라도 무창(현 전북 고창)에 있었고, 14·15일 일기에서 여진이라는 글자 뒤에 각각 스물 입(卄)과 서른 삽(卅)인 것처럼 보이는 글자를 썼다. 일각에선 이것이 ‘성관계 횟수’였다고 봤다. 또 “여진은 여진족을 말한 것으로, 곡식을 구하러 20~30명이 전라도까지 내려왔다는 기록”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그러나 노 소장이 고문서 전문가인 하영휘 전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살펴본 결과, ‘입’ ‘삽’으로 보이는 글자는 ‘함께 공(共)’자의 변형된 초서체로 판독됐다. 노 소장은 “이 글자는 ‘난중일기’에 72번 나오는데, 모두 일상적인 만남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기일 뿐”이라고 했다. 1596년 6월 24일에는 ‘경상수사(원균)도 와서 함께했다[共]’고 기록했다. 만약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의미라면 가까이 했다는 뜻으로 ‘근(近)’자를 썼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노 소장은 또 ‘난중일기’ 정유년에 등장하는 ‘독송사(讀宋史)’란 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 장군이 쓴 글이 아니라 명나라 학자 구준(丘濬·1420~1495)의 저작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