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이 피었사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선 조선 시대 임금이 쓰던 이동식 화장실인 ‘매화틀’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왕이나 왕비 같은 높은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그럼 내관, 궁녀, 수비대 병사 같은 수많은 궁궐 상주 인력은 어떻게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에 답을 주는 유적이 발굴됐다. 경복궁 근정전 동쪽에서 150여년 전의 대형 공중 화장실이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경복궁 발굴 중 동궁(왕세자 거주 공간)의 남쪽 지역에서 화장실 유구(옛 건축물의 흔적)를 확인했다”며 8일 현장을 공개했다. 조선 시대 궁궐에서 화장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인데, 이 화장실은 독특한 정화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현장에서 본 화장실 유적은 마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를 연상케 하는 석조 구덩이의 모습이었다.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긴 형태로, 바닥과 벽이 모두 돌로 돼 있고 돌 사이는 흙을 채워 분뇨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이곳 토양에선 1g당 1만8200건의 많은 기생충 알과 오이·가지·들깨 씨앗이 검출됐다. 이 연구소 양숙자 연구관은 “19세기 말의 ‘경복궁 배치도’와 1904년 ‘궁궐지’ 등을 통해 이 유적이 화장실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져 20여 년 동안 사용됐으며, 전체 75.5칸(1칸은 약 2.45m)에 이르는 경복궁 화장실 중 4~5칸 정도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덩이 위에 기와 지붕을 올린 건물이 있었고, 한 번에 최대 10명, 하루 150여 명이 사용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미생물을 이용하는 현대식 정화조와 비슷한 정화 시설이 이 화장실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를 물이 나가는 출수구보다 낮게 만들어, 유입된 물이 분변과 섞이면서 빨리 발효하게 했다. 찌꺼기는 바닥에 가라앉고, 분리된 오수는 높은 출수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배출되는 구조다. 발효된 분뇨는 악취와 독소가 줄어들어 비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장훈 한국생활악취연구소장은 “이 같은 방식의 분뇨 정화 시설은 당시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었다”며 “유럽과 일본은 19세기 말에야 생활 하수 처리 시설이 정착됐다”고 설명했다. 뜻밖에도 ’19세기 중반 독자적인 조선 화장실 정화 시설의 우수성'이 확인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