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게 웃는 김구 주석과 악수하고, 맥아더 일(日) 점령 최고사령관 부부를 한복 차림으로 맞는 아담한 갈색머리 여성. 흔히 볼 수 없는 사진의 주인공 푸랜시스카(프란체스카·1900~1992)는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인물이다. 1993년 4월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영부인’ 항목에서 육영수는 72.2%인 데 반해, 푸랜시스카는 1.5%에 불과했다. 30여 년 세월의 더께가 쌓인 현재, 망각 정도는 더할 것이다.
중견 정치학자인 김명섭(58) 연세대 교수가 이번 주 출간한 ‘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은 대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유럽 여성이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으로 권력 중심에 서는 과정을 푸랜시스카가 소장했거나 관련된 사진들을 통해 보여주는 진귀한 작업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국립 여성사 전시관 여성 독립운동가 DB에 박헌영 아내인 주세죽은 나와도 푸랜시스카는 없다”면서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의 해외 독립운동을 측근에서 도운 참모이자 대한민국 첫 대통령 부인인데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고 했다. 푸랜시스카는 흔히 프란체스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공식 호적명이 ‘푸랜시스카 또나’인 데다 본인 스스로 푸랜시스카로 썼다고 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4일 정부 수립을 위한 도미(渡美) 외교를 떠났다가 5개월 만인 1947년 4월 21일 김포비행장으로 귀국했다.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였다. 국내에 남았던 푸랜시스카는 비행장에 나온 김구·김규식을 맞으며 안주인 역할을 했다. 1946년 8월 1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8·15 시민 경축 대회에서 안중근 동생 안정근의 장녀이자 백범 큰며느리 겸 비서였던 안미생과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홀로 경교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1947년 7월 24일 백범 왼쪽에 나란히 앉아 포즈를 잡았다. 윤봉길 의거 후 백범 일행을 한 달간 집에 숨겨주고 도피를 도운 미국 선교사 조지 A 피치 부부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을 돌며 대중 유세를 다녔다. 부산 2만5000명~3만명, 대구 10만명, 전주 5만명, 정읍 6만명, 순천·목포 각 3만명 등 미 군정 추산 61만8000명(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50쪽)이 집회에 참석했을 만큼 열기는 뜨거웠다.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다지고 반대 세력을 제압한 ‘남선(南鮮) 순회’다. 군중이 가득 들어찬 운동장 연단에서 두 손 번쩍 들고 미소 짓는 푸랜시스카의 얼굴이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이 대중 정치가로 급부상하는 ‘남선 순회’ 때도 함께한 정치적 조력자였다.
1952년 8월 8일 강원도 수복 지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한 푸랜시스카는 태극기를 흔드는 주민들의 환호에 손을 번쩍 들어 화답한다. 김명섭 교수는 “푸랜시스카는 1946년 4~6월 이승만의 ‘남선 순회 등 주요 정치 일정마다 동행하면서 이승만이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도록 도왔고, 정부 수립 이후, 특히 6·25 직후엔 기차나 군용기로 전국을 찾아다니며 국민을 위로했다”고 말했다.
푸랜시스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이승만 평가와도 맞물려 있다. 이승만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푸랜시스카에게 인종적 낙인까지 덧붙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KBS 강의로 논란을 빚은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는 “오지리(오스트리아)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웨이트레스, 후란체스카란 양갈보”(‘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244쪽)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승만 옹호론자 중에서도 푸랜시스카를 ‘훌륭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은 영부인’으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말에 서툰 푸랜시스카는 영어가 능통했던 이기붕 비서 아내 박마리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김명섭 교수는 “이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였고, 대통령 면담 일정을 최종 확정한 ‘마담 푸랜시스카’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드는 논리로만 역사를 쓸 수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