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4월27일~29일 호남 지방의 황량한 들판을 이승만 대통령에 앞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푸랜시스카.
1948년8월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 장군 부인과 나란히 앉은 푸랜시스카.

환하게 웃는 김구 주석과 악수하고, 맥아더 일(日) 점령 최고사령관 부부를 한복 차림으로 맞는 아담한 갈색머리 여성. 흔히 볼 수 없는 사진의 주인공 푸랜시스카(프란체스카·1900~1992)는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인물이다. 1993년 4월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영부인’ 항목에서 육영수는 72.2%인 데 반해, 푸랜시스카는 1.5%에 불과했다. 30여 년 세월의 더께가 쌓인 현재, 망각 정도는 더할 것이다.

중견 정치학자인 김명섭(58) 연세대 교수가 이번 주 출간한 ‘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은 대한 독립운동에 참여한 유럽 여성이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으로 권력 중심에 서는 과정을 푸랜시스카가 소장했거나 관련된 사진들을 통해 보여주는 진귀한 작업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 국립 여성사 전시관 여성 독립운동가 DB에 박헌영 아내인 주세죽은 나와도 푸랜시스카는 없다”면서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의 해외 독립운동을 측근에서 도운 참모이자 대한민국 첫 대통령 부인인데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고 했다. 푸랜시스카는 흔히 프란체스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공식 호적명이 ‘푸랜시스카 또나’인 데다 본인 스스로 푸랜시스카로 썼다고 했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4일 정부 수립을 위한 도미(渡美) 외교를 떠났다가 5개월 만인 1947년 4월 21일 김포비행장으로 귀국했다.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였다. 국내에 남았던 푸랜시스카는 비행장에 나온 김구·김규식을 맞으며 안주인 역할을 했다. 1946년 8월 15일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8·15 시민 경축 대회에서 안중근 동생 안정근의 장녀이자 백범 큰며느리 겸 비서였던 안미생과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홀로 경교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1947년 7월 24일 백범 왼쪽에 나란히 앉아 포즈를 잡았다. 윤봉길 의거 후 백범 일행을 한 달간 집에 숨겨주고 도피를 도운 미국 선교사 조지 A 피치 부부를 환영하는 자리였다.

1946년 8월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8.15경축대회에 참석한 푸랜시스카. 백범(가운데) 큰 며느리이자 비서인 안미생(안중군 동생 안정근 장녀)과 나란히 팔장을 낀 채 다정한 모습이다. 안미생은 홍콩과 호주에서 공부해 영어에 능통했다. 푸랜시스카가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가 아니라 안미생과 가깝게 지냈으면 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소장
1947년4월21일 김포비행장에서 백범과 악수하는 푸랜시스카. 이승만은 1946년12월부터 5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도미외교를 펼치고 이날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함께 귀국했다. 푸랜시스카는 홀로 국내에 머물렀다./'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소장
1947년7월24일 경교장을 찾은 푸랜시스카가 백범 김구 주석 오른쪽에서 포즈를 취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도운 조지 A 피치 목사 부부((앞줄 오른쪽)를 환영하는 자리였다./'푸랜시스카 사진의 한국사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소장
1948년 10월16일 연희대 언더우드 동상 재건식에 참석한 백범 김구와 이승만 대통령 부부. 김규식, 백낙준, 이묘묵(연희동문회회장, 하지 중장 통역및 자문관 역임) 등도 참석했다. /연세대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국을 돌며 대중 유세를 다녔다. 부산 2만5000명~3만명, 대구 10만명, 전주 5만명, 정읍 6만명, 순천·목포 각 3만명 등 미 군정 추산 61만8000명(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550쪽)이 집회에 참석했을 만큼 열기는 뜨거웠다.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다지고 반대 세력을 제압한 ‘남선(南鮮) 순회’다. 군중이 가득 들어찬 운동장 연단에서 두 손 번쩍 들고 미소 짓는 푸랜시스카의 얼굴이 보인다.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이 대중 정치가로 급부상하는 ‘남선 순회’ 때도 함께한 정치적 조력자였다.


1946년3월26일 이승만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측근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이승만 부부. 푸랜시스카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푸랜시스카 왼쪽이 윤치영, 사진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1946년4월29일 부산구덕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집회(왼쪽)에 참석한 푸랜시스카. 2만5000명에서 3만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이해 4월~6월 남선순회를 통해 전국을 돌며 대중 정치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1946년6월6일 군산서 촬영한 이승만과 푸랜시스카. 사흘전 정읍발언 직후 찍은 사진이다. 북의 정권 수립에 맞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그해 4월부터 시작한 '남선순회'의 피날레를 찍었다. 푸랜시스카는 이승만이 대중정치가로 입지를 다진 남선순회에 비서이자 조력자로 동행했다.
1952년 8월8일 강원도 양양 인근 수복지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푸랜시스카가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1952년1월6일 광주를 찾은 푸랜시스카. 푸랜시스카는 6.25때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군용기를 타고 전국을 찾아다니며 군 장병과 시민들을 위로했다.
1950년5월27일 전주 외곽 신복리 농가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1951년4월3일 부산 부민동 대통령관저에서 기념촬영했다. 미국 퇴역군인 조직인 육해군연맹 아메리카니즘 위원회가 이 대통령의 독립운동과 반공투쟁의 공적을 기리는 훈장을 수여한 기념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푸랜시스카 오른쪽으로 콜터 주한미8군부사령관, 신익희 국회의장, 김준연 법무장관, 김병로 대법원장, 조봉암 국회부의장, 장택상 국회부의장, 신성모 국방장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이 대통령 왼쪽으로 무초 대사, 장면 총리, 백낙준 문교장관 한 사람 건너 이윤영 무임소장관, 전규홍 총무처장, 한 사람 건너 장기영 체신장관, 백두진 재무장관 등이 보인다.


1952년 8월 8일 강원도 수복 지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한 푸랜시스카는 태극기를 흔드는 주민들의 환호에 손을 번쩍 들어 화답한다. 김명섭 교수는 “푸랜시스카는 1946년 4~6월 이승만의 ‘남선 순회 등 주요 정치 일정마다 동행하면서 이승만이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도록 도왔고, 정부 수립 이후, 특히 6·25 직후엔 기차나 군용기로 전국을 찾아다니며 국민을 위로했다”고 말했다.

푸랜시스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이승만 평가와도 맞물려 있다. 이승만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푸랜시스카에게 인종적 낙인까지 덧붙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KBS 강의로 논란을 빚은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는 “오지리(오스트리아)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웨이트레스, 후란체스카란 양갈보”(‘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244쪽)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승만 옹호론자 중에서도 푸랜시스카를 ‘훌륭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은 영부인’으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말에 서툰 푸랜시스카는 영어가 능통했던 이기붕 비서 아내 박마리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김명섭 교수는 “이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였고, 대통령 면담 일정을 최종 확정한 ‘마담 푸랜시스카’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드는 논리로만 역사를 쓸 수는 없다”고 했다.

열여섯살의 푸랜시스카
1930년대 후반 하와이에서 애견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푸랜시스카. 개를 사랑한 푸랜시스카는 경무대에 애견을 들여와 키운 첫번째 영부인이었다.
1930년대 후반 하와이에서 자동차에 탄 애견과 함께 포즈를 취한 푸랜시스카.
1919년 유럽 어느 도시에서 찍은 열아홉살 푸랜시스카. 오스트리아 출신 이 소녀가 지구 반대쪽 대한민국 첫 영부인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1942년2월27일~3월1일 워싱턴 D.C. 라파예트 호텔에서 개최된 대한자유인대회. 앞줄 왼쪽 첫번째 미국인 여성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조치 피치 목사 부인. 푸랜시스카는 두번째줄 왼쪽에서 세번째.
1944년8월29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한미협회에 참석한 이승만 부부. 한미협회는 이승만의 대미독립외교를 돕기 위해 친한파 미국인들이 결성한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