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가 지난 7월 '기초 수행비' 지급대상자로 선정된 스님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이진한 기자

◇ 해인사, 재적승 194명에 월 15만원씩 ‘기초 수행비’ 지급

‘불교판 기본소득’이 등장했습니다.

조계종 제12교구 본사(本寺)인 해인사(주지 현응 스님)가 지난 7월부터 교구 재적승 194명에게 1인당 월 15만원의 ‘기초 수행비’ 지급을 시작했습니다. 해인사는 최근 “분한신고와 결계신고를 마친 비구 중덕, 비구니 정덕 법계 이상의 해인사 재적승을 대상으로, 194명의 지급대상자를 확정해 스님들 개별 통장으로 기초 수행비 15만원을 입급했다”고 밝혔습니다. 발표 내용이 암호처럼 느껴지는 분 많으시지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분한(分限) 신고’와 결계(結界) 신고는 조계종 소속 스님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인구 센서스’입니다. 비구는 남자 스님, 비구니는 여자 스님입니다. 중덕(中德)과 정덕(定德)은 각각 출가한 지 10년차 스님들입니다. 재적승은 해인사가 교구 본사인 12교구 소속 스님을 뜻하지요.

이번에 해인사가 도입한 ‘기초 수행비’는 속세의 ‘전국민 기본 소득’이 아니라 ‘선별적 기본 소득’ 혹은 ‘기초 생활수급’ 선정 및 지급인 셈입니다. 제12교구 전체 재적승은 대상자는 약 14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작년(2020년) 분한신고 때 해인사는 이분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이 명단이 기본 데이터베이스가 됐습니다.

◇ 10년차 이상, 월소득 50만원 미만 스님들이 대상

지급 대상은 몇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일단 출가 후 10년이 넘는 분이 대상인데, 이 기준에 맞는 분은 1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일정한 소득이 있는 분들은 제외됩니다. 본사나 말사(末寺) 주지 등 소임을 맡은 스님, 복지관장 등 고정 수입이 있는 스님 등이지요. 월소득 기준은 50만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경우를 추려보니 최대 500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하네요.

경남 합천 해인사 전경.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는 모두 1400여명의 스님이 적을 두고 있다. /해인사

해인사는 지난 4월 25일부터 6월 30일까지 ‘기초수행비’ 신청을 받아 심사를 했답니다. 위에 말씀드린 기준에 맞는지 여부를 따져본 것이지요. 모두 197명이 신청했고, 심사를 거쳐 194명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심사에서 제외된 3명은 종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에 살거나 수입이 있는 분들이었다고 합니다. 7월 1차 지급 후에도 신청이 이어져 8월에는 200명 넘는 스님들이 기초 수행비를 받을 예정입니다.

◇ ‘승가공동체 회복’ 위해 십시일반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에서 짐작하셨듯이 해인사가 ‘기초 수행비’ 지급에 나서게 된 것도 스님들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때문입니다. 과거 스님들은 무소유로 살았지요. 스님들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사찰도 인심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면서 소임(보직)을 맡는 스님들은 수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스님들은 수입이 없게 됐지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스님들은 스스로 노후 대비를 위해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이 와중에 비리가 싹 틀 여지가 생기곤 했습니다. 월 15만원’이 적다면 적을 수 있지만 아무런 고정 수입이 없는 스님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해인사가 기초수행비를 계획하게 된 것도 이런 분위기를 스스로 개선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인사는 재적승 규모로 보면 전국 교구 본사 중 최대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인사가 움직이면 전체 불교계에 여파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 /조선일보DB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은 ‘조계종의 재사(才士)’로 유명한 분입니다. 1994년 종단 개혁 때부터 고비고비마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분이지요. 현응 스님이 조계종 스님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원장을 10년 지낸 후 재작년 해인사 주지로 선출됐을 때부터 불교계 안팎에선 해인사를 주목했습니다. ‘이번엔 또 어떤 아이디어를 낼까’하는 관심이었지요. 역시, 현응 스님은 기대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사태에 맞춰 유튜브(해인사 TV)를 시작했고,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장경판전을 일반에 개방했습니다(주말에 진행하던 이 행사는 코로나가 확산하면서 현재는 일시 중단된 상태입니다). 오는 14일엔 음력 칠월칠석에 맞춰 대장경을 인쇄한 책들을 꺼내어 ‘일광욕’시키는 ‘포쇄’ 행사도 갖습니다. 이런 행사가 해인사의 보물을 일반인들과 나누는 이벤트라면, ‘기초 수행비’는 승가 내부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 “스님들이 기초 생활도 안 되면 누가 불교 존중하겠나”

현응 스님은 ‘기초 수행비 지급’에 대해 “승가공동체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했습니다. “인연따라 소임을 맡게 되는 스님들은 계속 소임을 맡는 경우가 많아 기본적인 소득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지 못한 스님들은 기본적인 생활도 어려울 정도”라는 문제의식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스님들이 존중받으면 법(불교의 가르침)도 존중받고, 스님들이 존중받지 못하면 법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며 “승가 공동체 스스로 스님들의 생활을 책임지자는 각오로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사찰은 거대한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대학 캠퍼스 역할을 했다고 할까요. 그런데 그 교육기관의 교수들이 기본적인 생활까지 걱정할 정도라면 누가 그 가르침을 존중하겠습니까. 그래서 해인사는 필요한 분들에게는 교수 연구실 삼아 기본적인 방(거주지)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2021년 6월 10일 팔만대장경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부처님께 알리는 '고불식' 후 해인사 스님들이 팔만대장경을 모신 판전으로 오르고 있다. /김한수 기자

◇ 기부자-수혜자 모두 “소속감, 자부심” 느껴

방향은 정했지만 1400명 전체 재적승의 생활을 모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한정된 재원 내에서 운용 방안을 정했지요. 그래서 우선 1인당 월 15만원으로 지급 규모를 정했다고 하지요. 또 교구에 소속된 사찰들을 대상으로 자발적 보시 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1구좌당 15만원씩, 최대 5구좌(75만원)까지 기금을 모금하고 있지요. 기본적인 비용은 해인사가 감당하고 각 사찰의 참여는 철저히 자발성에 맡기기로 했답니다. 현응 스님도 개별적으로 들어오는 보시는 대부분 ‘기초 수행비’에 적립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초 수행비’는 받는 분과 기부하는 분 양측의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해인사에 적(籍)을 둔 출가자로서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낀다”는 의견이 양쪽에서 들어오고 있다네요.

해인사는 앞으로 재적승이 입적할 경우엔 1400명 재적승에게 부고를 휴대전화로 보내 알릴 계획입니다. 또 필요할 경우엔 장례비용도 부담할 계획이랍니다. 경조사 중 특히 어려움을 함께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정을 돈독히 하게 하는 것은 승속(僧俗)의 구분이 없으니까요. 해인사의 실험 결과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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