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분을 만났습니다. 유재철 연화회 대표입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북 문경 봉암사 가는 길. 고우(古愚) 스님 빈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왠 트럭이 앞에서 계속 같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슨 트럭인 줄 몰랐습니다. 과속방지턱을 만났을 때 비로소 행선지가 같은 트럭인 줄 알았습니다. 잠시 속도가 늦춰진 틈에 보니 트럭에 실린 화물은 참나무 장작이더군요. 강원도 번호판을 단 그 트럭은 목적지가 같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봉암사 입구엔 유 대표가 나와있었습니다. 9월 2일로 예정된 고우 스님의 다비식을 위한 장작이었습니다.
유 대표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사회 저명 인사들의 장례를 도맡다시피하는 분입니다. ‘대통령의 염장이’라고도 불리지요. 그런데 사실 유 대표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불교 장례문화를 바꿔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10년 정도 큰스님의 장례는 유 대표가 도맡아왔거든요. 2010년 법정 스님을 비롯해 고산 스님, 월주 스님에 이어 고우 스님 장례까지 그가 맡았습니다. 유 대표는 특히 2013년부터 다비(화장) 시간을 크게 줄이고 있습니다.
제가 문화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던 1993년 11월. 한국 현대불교의 큰 별이 졌습니다. 성철 스님이시죠. 그 당시엔 다비가 끝난 후에도 기자들이 해인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당시만해도 큰스님이 입적하시면 다비 후 사리(舍利)가 얼마나 나오는가에 관심에 쏠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비가 이틀, 사흘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그 바람에 수습된 사리 숫자를 날짜별로 중계방송하듯이 했지요. 과도한 관심도 쏠렸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래도 불교와 큰스님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대 들어 불교계에서도 자성(自省)이 있었습니다. 사리 숫자가 깨달음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지난 2003년은 지금까지도 ‘열반의 가을’이라 불립니다. 그해 가을~겨울에만 큰스님 예닐곱분이 입적하셨거든요. 당시 신문 사회면엔 “스님, 불 들어가요. 나오세요”라는 제목의 다비식 기사가 자주 실렸습니다. 당시에도 다비식 후 사리를 수습하기까지는 보통 이틀에서 사흘이 걸렸습니다. 당시는 각 사찰별로 풍습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백양사의 경우가 기억납니다. 서옹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인데요, 장작더미 아래에 땅을 파고 물을 채운 항아리를 묻더군요. 그리고 다비가 다 끝난 후 항아리 물 속에 맺힌 사리를 수습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2010년 법정 스님 다비식이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목관(木棺) 대신 평소 사용하시던 평상에 누워 다비식장으로 향하셨지요. 또한 “사리 찾으려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고도 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리는 찾지 않았지만 당시 법정 스님 다비식도 하루를 꼬박 지난 후에 마무리됐지요.
다비식이 만 하루 안에 마무리된 것은 2013년부터입니다. 그해에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는 ‘다비현황보고서’ 작성을 위해 조사단을 구성하고, 장례 경험이 많은 유 대표도 여기 참석했답니다. 당시 조사단은 해인사·선암사·범어사·백양사·수덕사·봉선사 등 전국 권역별 대표 사찰의 다비 방식을 연구했답니다. 당시에도 이미 사찰들에선 전통 방식으로 다비를 거행할 인력이 줄어들고 있었지요. 이런 연구를 거쳐서 다비식 당일에 사리 수습까지 마치는 방식이 고안됐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 대부분 사찰이 이런 방식의 다비식으로 수렴돼 가고 있습니다.
저도 말로만 듣다가 지난 7월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 다비식 때에야 비로소 현장을 처음 보았습니다. 참나무 장작이 작은 피라미드처럼 쌓인 가운데 한쪽엔 연통이 길게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엔 모터가 있었지요. 상좌 스님과 신도 대표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거화(擧火) 의식이 진행되면 모터가 작동합니다. 그러면 밖에서 보기엔 갑자기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장작 더미 아래의 연통을 통해서 산소가 공급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비식을 진행하면 사리를 수습하기까지 3시간반~6시간 정도면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휘발유 등 유류(油類)는 사용하지 않고 참숯과 산소로만 완전연소를 돕는 방식입니다.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입적을 앞둔 스님들이 이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고령의 스님들 역시 젊은 시절 밤을 새우며 다비장을 지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입적 후 제자들이 밤새며 사리를 수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속세의 어르신들이 연명치료를 거부하듯이 말이죠. 저도 개인적으로 간결한 다비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로서 군더더기 없이 살아온 분들의 마지막 길 역시 깔끔한 편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큰스님 열반 후 사리 숫자를 헤아리던 것도 옛말이 됐습니다. 최근 들어선 큰스님들이 평생 수행해온 결과를 한 문장에 담은 ‘임종게(臨終偈·열반송)’도 남기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월주 스님도 “삶 그 자체가 임종게”라고 생전에 말씀하셨고, 엊그제 입적하신 고우 스님도 따로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갔다고 하라’가 전부였습니다.
고우 스님은 평생 수행자로 살다가 수행자답게 떠났습니다. 고우 스님이 2006년부터 마지막까지 머문 경북 봉화 금봉암은 제사·기도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부처님오신날 연등도 달지 않았습니다. 사찰 수입을 마다하신 것이죠. 봉암사 동방장에 마련된 빈소는 좁았지만 깔끔했습니다.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질색한 스님의 빈소다웠습니다. 내일(9월 2일) 오전 엄수될 영결식과 다비식 역시 담백할 것입니다. 고우 스님의 마지막이자 ‘무언의 법문’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