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하디 선교사

“하디 선교사가 수없이 ‘회개하라’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던 교인들이 ‘저부터 회개합니다’ 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무려 1200쪽에 육박하는 ‘영(靈)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최근 펴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 출신 감리교 의사 선교사로 1890년 조선에 온 하디(1865~1949)는 선교사, 신학 교육자, 신학 교재 60여 권을 쓴 저술가로 평생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 부흥 운동은 4년 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사건.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도 하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이후 원산교회는 부흥했다. 새 건물을 짓고 기념촬영한 모습.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에 따르면 하디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회개’가 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원산 부흥 운동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하디는 1902년 무렵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10년째인 이때까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인 집을 불시에 방문해 보니 술상을 놓고 교인 모임을 하고 있었고,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하디는 ‘세례 교인’을 ‘학습 교인’으로 강등시키고 ‘제명’ ‘무기한 (예배) 출석 금지’ 조치도 내렸다. 선교 보고서에 “원산 교인들의 영적(靈的) 상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적을 정도였다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내 로버트 하디 가족묘 앞에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전기 쓴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지 원산에 모여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열었다. 최고참 선교사 하디가 설교를 맡게 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었고, 조선 교인들을 오만과 교만으로 대했음을 통회(痛悔)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 그동안 ‘조선 교인 탓’을 하던 하디가 ‘내 탓’이라고 고백하자 다른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조선 교인들로 회개의 불길이 번졌다.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갚지 않은 돈을 갚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졌고, 20년 전 본의 아니게 더 받은 봉급을 반환하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 이전까지 ‘회개’는 무슨 뜻인지 감(感)도 못 잡던 조선 교인들이 비로소 회개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이다. 부흥의 불길은 이내 원산에서 서울,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후인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인이 차지할 정도로 개신교가 이 땅에 탄탄히 자리 잡게 됐다.

하디 선교사 부부(오른쪽)와 애비슨 선교사 부부. 하디 선교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는 하디의 삶을 통해 개신교가 조선에 전해져 뿌리 내리는 과정을 꼼꼼히 재구성했다. 그는 “원산 부흥 운동의 본질은 ‘물질적 성장’이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본질적 변화였기에 가능했다”며 “코로나 시대를 맞은 한국 교회도 하디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선이고 본질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949년 사망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묘비. /신앙과지성사

2023년 원산 부흥 운동 120주년을 앞두고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운 간성·강릉중앙·광희문·석교·수표교·양양·종교교회가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본부와 감리교신학대가 평전 발간에 뜻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