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강원룡, 안병무가 김원웅 광복회장의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 강의를 들었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여당 대선 유력 후보의 ‘미군=점령군’ 주장에 “여기가 목숨 걸고 내려온 대한민국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민족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함석헌은 일제 땐 항일, 자유당 정권과 유신 정권 때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재야 원로다.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해 시민 운동가를 길러낸 강원룡은 1974년 함석헌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 유신 정권에 저항한 대표적 지식인이다. ‘민중신학’ 대부인 안병무 한신대 교수도 ‘3선 개헌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1972)과 ‘3·1 구국선언’(1976)에 앞장서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투옥됐다.
‘운동권’ 원조(元祖)인 셋은 모두 이북 출신으로 해방 직후 소련군과 공산당의 폭정을 체험하고 월남했다. 이들은 강간과 약탈, 살인과 폭력을 자행하는 ‘해방군’ 소련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함석헌 “소련군의 약탈, 강간...온 시내가 공포”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함석헌(1901~1989)은 집 앞 채마밭에서 거름을 주다 해방을 맞았다.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직된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에서 문교부장을 맡아 일하던 1945년 9월 말 신의주에 소련군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오자 온 시내는 공포 기분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다음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함석헌이 자신이 내던 월간지 ‘씨알의 소리’(1971년 ·11월)에 쓴 ‘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에 나온다.
소련군이 포고문에 썼다는 ‘해방군’ 실상은 이랬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색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가·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신의주 학생들이 소련군과 공산당 폭정에 맞서 일어났다. 공산당이 장악한 자치위원회와 공산당 본부에 항의하러 몰려간 것이다. 1945년 11월 23일 함석헌은 현장에 있었다. ‘총소리가 몇 방 땅땅 하고 났다. 가 보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학생들을 안아 일으켰지만 둘은 벌써 숨이 끊어졌고, 하나는 숨은 있었으나 가망이 없어 보였다.
공산당 본부는 더 심각했다. ‘까만 교복을 입은 것들이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그때 인상으로 한 20명은 될까.’ 뜰에 가득한 소련군인들은 일제히 함석헌의 가슴에 총검을 들이댔다. 50일가량 구금됐던 함석헌은 풀려났다 다시 잡혀가길 반복했다. 스파이 노릇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견디다 못한 함석헌은 1947년 2월 26일 월남했다.
◇강원룡, “여자만 보면 강간하고, 시계 빼앗아”
함남 이원군 출신인 강원룡(1917~2006)은 1945년 8월 산속에 숨어있다 뒤늦게 해방 소식을 들었다. 사상범으로 몰려 체포됐다가 가석방 상태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진주한 세상은 무법천지였다. 스물여덟 강원룡도 시계를 약탈당하고, 인민재판에 회부돼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하지만 외삼촌은 더 곤욕을 치렀다. ‘몸에 ‘개’라고 쓴 쪽지를 붙이고 목에 사슬이 묶인 채 진짜 개처럼 ‘웡웡’거리며 기어다녀야 했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는 인민재판에선 살아났으나 마창툰에서 원산으로 빠져나와 서울로 올 기회를 엿보다가 그만 공산군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역사의 언덕에서’ 1권)
소련 군정과 공산당의 폭주를 본 강원룡은 단신 월남해 9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와서 미군을 접하게 된 나는 소련군과는 크게 다른 미군의 태도를 보고 미군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만 보면 잡아다 강간하고, 시계고 반지고 값나가는 물건이면 다 빼앗고, 심지어 공장 시설까지 다 뜯어 소련으로 실어갔던 소련군에 비해 미군은 그런 일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태도가 매우 깔끔해 보였다.’(같은 책)
강원룡은 경동교회 담임목사와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종교 간 대화에 앞장섰다. 노태우 정부 때 방송위원장과 김대중 정부 때 방송개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2003년 낸 회고록 ‘역사의 언덕에서’ 부제는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체험’이다.
◇안병무 “플래카드 들고가 영접했는데...”
평남 안주 출신인 안병무(1922~1996)는 돌도 채 지나기 전에 간도로 이주했다. 강원룡과 윤동주, 문익환·문동환 목사가 다닌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스물넷이던 1946년 간도에서 좌익과 충돌하면서 월남했다. 그 상황을 1986년 한길사에서 낸 계간지 ‘오늘의 책’ 여름호 대담에서 밝혔고, 이듬해 낸 ‘민중신학이야기’에 수록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해방군이 왔다고 모두들 플래카드를 만들어 들고 나가서 영접을 했는데, 그놈들이 닥치는 대로 부녀자를 강간하는 것을 보고는, 결국 해방돼도 힘없는 민족은 여전히 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현실에 절망을 느끼며 간도를 떠나 두만강을 울면서 건너왔습니다.’ 함석헌, 강원룡과 거의 같은 증언이다.
소련군의 강간과 폭력, 약탈은 월남민들이 한결같이 쏟아낸 증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생한 증언은 철 지난 ‘반공타령’ 취급받은 지 오래다. 사회학자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소련군의 폭력을 체험한 세대가 광복 70년이 넘으면서 거의 돌아가셨고 증언의 힘도 많이 약화됐다”고 했다. 정치학자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함석헌 선생 같은 민주화운동 본류는 소련이나 김일성 정권을 직접 겪어보고 이들과 분명히 선을 그었는데. 1980년대 운동권 영향을 받은 정치인들은 사실과 다른 정치적 주장을 편다”면서 “기억을 다루는 역사학자들이 제 역할을 못한 데도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스탈린, 발트 3국 민족주의자 20만명 강제 수용소 보내]
만주서도 ‘붉은 군대’ 약탈 심해
2차 대전 후반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과 발트 3국에선 소련군에 의한 강간과 약탈, 폭력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특히 독일로 진격한 소련 병사들은 지휘관 묵인 아래 보복 차원의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다. 스탈린주의 테러다.
패전과 함께 동유럽에서 쫓겨난 독일 피란민 1200만명 중 소련과 공산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최대 200만으로 추산된다. 독일을 점령한 소련군은 닥치는 대로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스탈린주의 테러는 냉전 당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가 1990년대 소련 붕괴 후 동구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소련은 2900만명이 숨진 2차 대전 최대 피해국이기에 나치 독일에 대한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탈린은 발트 3국에서도 피의 숙청을 벌였다. 2차 대전 종전 후 발트 3국의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을 소련 강제 노동수용소로 대거 추방했다. 리투아니아 8만명, 라트비아 4만2000명, 에스토니아 2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1941년부터 따지면 스탈린이 추방한 발트 3국 주민 수는 20만명이 넘는다. 소련 통치에 거슬리는 민족주의자를 제거한 것이다.
소련군 테러가 만주와 북한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련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인 1945년 8월 9일 뒤늦게 대일(對日)전에 끼어들면서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붉은 군대의 약탈과 강간은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타계한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많은 일본 여인이 능욕당했다” “수많은 화차가 항상 북쪽을 향해 움직였다”며 랴오양에서 일어난 소련군 약탈과 강간을 자서전에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