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등 3인의 유해가 9월 16일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에 안치됐습니다. 지난 3월 발굴 이후 반년만이며, 1791년 순교 당시로부터 계산하면 230년만입니다. 이번 발굴은 한국 천주교 역사의 첫번째 페이지의 첫번째 퍼즐 조각을 맞춰주는 획기적 사건입니다. 구전(口傳)과 기록으로 전해지던 첫 순교자의 역사가 과학의 도움으로 신앙과 다시 만나게 된 사건이지요.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순교자의 유해가 확인된 것은 성인 103위(位) 중 27명, 복자 124위 중 19명뿐이었습니다.
◇역사-한국 천주교 역사의 첫 페이지
“북경에 간 사람들은 모두 제일 먼저 천주당을 구경한다.”
178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시 지식인 사이에선 북경 천주당 구경이 유행이었습니다. 박지원이 천주당을 찾은 것은 ‘풍금(風琴·파이프오르간)’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5년 먼저 북경을 다녀온 홍대용의 자랑을 들었거든요. 홍대용의 눈에 파이프오르간은 다른 무엇보다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눈으로 확인하는 증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 천주당은 화재 피해를 입어 풍금은 없어진 상태. 박지원은 풍금은 못 봤지만 천주당 천정에 그려진 아기 천사 그림을 보고 “갑자기 이를 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면서 머리를 잦히고 떨어지는 애기들을 받으려고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리게 된다”며 서양화의 사실적 화풍에 감탄합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지식인 사회에선 북경 천주당은 서구 과학문명 박람회장처럼 보였을 것 같습니다. 과학문명에 대한 호기심은 서양 학문(서학)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신앙으로 연결됐습니다.
1784년 역시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찾은 이승훈은 현지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우곤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습니다. 귀국길에는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과 묵주 등을 가지고 와서 이벽·권일신·정약용 등에게 세례까지 줬습니다. 그리고 한양 남산 아래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신앙 모임을 갖게 되지요. 자생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과정입니다.
한국 천주교 첫 장면의 특징은 명문가 엘리트들의 혈연 네트워크를 통해 확산했다는 점입니다. 다산 정약용 집안이 중심이었습니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다산의 자형, 백서사건의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였지요. 또 이번에 발굴된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은 다산의 고종사촌 동생으로 다산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지요. 윤지충과 함께 순교한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사촌이었고요.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후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땅에 매장한 유항검 역시 윤지충과는 이종사촌, 권상연과는 내외종사촌 사이였습니다. 혈연을 중심으로 최초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던 것이지요.
이들은 먼저 배운 이가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도 줬지요. 그러다가 이승훈은 뒤늦게 신자가 사제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假)성직제도’는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 제사금지령을 가장 먼저 실천한 이가 윤지충이었습니다.
윤지충은 179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권상연도 마찬가지였지요. 소문이 퍼지자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말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합니다. 두 사람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외쳤다고 합니다. 유족들은 처형 9일만에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첫 순교자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20여년이 흐른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을 열고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명의 순교자를 복자(福者)품에 올렸습니다. 대표로 호명된 이름이 바로 ‘윤지충’이었습니다. 당시 함께 복자로 선포된 이들은 양반이 다수이지만 중인과 천민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미 1790~1800년 사이에 천주교는 다양한 사회계층으로 확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과학-의학, 고고학, 국방부 유해감식단까지
‘예기(銳器)손상’ ‘Y-STR’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윤지충 바오로 등 3인의 순교자 유해 조사 과정에는 이 같은 과학과 법의학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230년 전 무덤의 주인공이 순교자들이었음을 밝히는 데 현대 과학기술이 총동원됐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번 유해 발굴은 우연이었습니다. 유해가 발굴된 것은 2021년 3월 11일. 천주교 전주교구는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일대를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무연고 묘지를 개장했는데, 거기서 윤지충을 비롯한 3인의 순교자 유해가 발굴된 것이지요. 이곳은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의 땅으로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유항검 등 가족의 묘지였습니다. 유항검 가족 묘는 1914년 치명자산성지로 이장될 때까지 이곳에 100여년간 묻혀 있었습니다. 그 이후 남은 분묘는 주인공이 누군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개장에 앞서 2020년 10월부터 3개월간 공고문을 붙이고 후손을 찾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개장하던 중 일반 분묘보다 깊은 땅에서 유해가 나왔습니다. 유해는 목뼈 등에 예리한 기구로 손상한 흔적이 발견됐지요. 참형을 당한 순교자일 가능성이 높았지요. 또 무덤의 주인의 신상을 적은 사발도 나왔지요. 그 사발엔 ‘윤지충 보록(保祿·바오로)’이란 세례명도 나오면서 230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윤지충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아졌지요. 230년 전 조상들의 지혜도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각각의 무덤에는 ‘왼쪽엔 누구 묘가 있다’ ‘오른쪽엔 누구 묘가 있다’는 ‘안내’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교구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정황으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라는 점이 분명해 보였지만 보다 정밀한 과학적 검증에 나선 것이지요. 고고학·해부학 전문가에게 묘소와 유해에 관한 감식을 의뢰했습니다. 정밀조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묘지의 조성연대와 출토물의 연대가 윤지충·권상연이 순교한 1791년과 부합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백자사발지석의 명문 내용도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유해에 대한 해부학적 조사는 성별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등을 진행했습니다. Y염색체 부계(父系) 확인검사도 했지요. 해남윤씨와 안동권씨 친족 남성 5명의 유전정보와 일치한다는 결과도 나왔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유해의 나이, 성별, 키(신장)를 감식하는 과정에는 국방부 유해발굴단 임정민 감식관이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전주교구는 7월말까지 감식을 마친 후 8월 18일엔 ‘특별법정’을 열었습니다. 교회법적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 결과 “모든 절차에 교회법적 결격 사유가 없고, 과학적 연구결과와 고고학적 분석 결과 그리고 교회의 역사적 문헌 등 증거물을 검토한 결과, 이에 반대되는 주장과 증거가 없어 바우배기에서 발굴 및 수습된 유해가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임을 선언한다”고 밝혔지요. 이어 9월 1일엔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이 유해들이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유해라고 선언하며, 이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척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시 신앙-聖光 속에 모셔져 공경 대상으로
지난 9월 16일 초남이성지에선 세 순교자에 대한 현양 미사와 유해 안치식이 열렸습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주례한 이날 안치식은 세 순교자의 유해를 성지 내 ‘교리당’에 모시는 의식이었습니다. 3월 11일 발굴 이후 전북대 의대에 보관돼 있던 유해는 이날 아침 성지로 옮겨졌습니다. 유해는 공기 차단을 위해 한지로 싼 다음 지퍼백으로 밀봉했습니다. 관 속에도 제습제를 많이 넣었지요. 안치식에서 김선태 주교는 유해가 잘 안치된 것을 확인한 후 봉인했습니다. 그리고 세 순교자의 관 위에는 유해의 일부를 모신 성광(聖光)이 올려졌습니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갈비뼈, 권상연 야고보 복자는 두개골 일부가 모셔졌다고 합니다.
이날 김선태 주교는 “순교복자들의 유해는 이곳에서 존재 자체로 신앙의 진리를 가장 호소력 있게 전한다”며 “이로써 교리당은 그야말로 교리당으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김 주교는 또 “코로나 사태로 크게 지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큰 선물을 베푸셨다”며 “순교자의 모범을 본받아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