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진 두 장이 있습니다. 둘 다 성모자(聖母子) 즉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인데요, 각각 복장이 다르지요? 왼쪽은 만주족 황후 복장의 성모와 황제 복장의 아기 예수입니다. 오른쪽은 모자(母子)의 복장이 한족(漢族) 황후와 황제이고요. 북경 천주교 북당(北堂)에 있는 성모자상입니다. 아마도 북당을 담당했던 프랑스 선교사 출신 화가가 그린 성화인 듯합니다. 성모자상은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복 입은 성모자상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성화에는 지배층인 소수의 만주족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융합을 꾀했던 청 왕조의 정책적 배려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그림 속 성모자는 만주족은 얼굴이 좀 길쭉하고, 한족은 둥글게 묘사된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 사진들은 인하대 사학과 이준갑 교수님이 최근 펴낸 저서 ‘건륭제와 천주교’(혜안)에 수록됐습니다. 지난 9월초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에서 발견된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분묘 안에서 발견된 사발 속에는 ‘건륭(乾隆) 57년’이란 글씨가 나왔습니다. 건륭 57년은 서기 1792년으로, 매장 일시를 표기한 것입니다. 윤지충 등이 순교한 것은 1791년이니 1년 후에 매장한 것이지요.
청나라 역시 건륭제(재위 1736~1795) 연간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많이 있었습니다. 건륭제 말기인 1784~1786년에 있었던 ‘건륭대교안(大敎案)’이 대표적 사건이지요. 아시다시피 중국엔 명나라 말기 마테오리치 등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졌지요. 초기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을 그대로 인정했답니다. 공자 숭배, 조상 제사, 상제(上帝)라는 호칭 등을 다 인정했지요. 중국 사회에 빨리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었겠지요. 그러나 100여년쯤 흐른 강희제(재위 1662~1722) 말년에 이르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한번은 교황 특사가 강희제를 알현했습니다. 목적은 각 수도회별로 중국에 파견된 천주교 선교사들을 총괄 통제할 ‘감독자’를 파견할 테니 받아달라는 것이었지요. 강희제는 “감독자에는 중국에 10년 이상 거주한 자로서 ‘내가 보기에’ 중국인의 생활과 언어, 풍습을 익히 아는 자가 임명되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조너선 스펜서 ‘강희제’) ‘감독자’는 교황이 아닌 자신이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지요. 또 당시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중국인 신자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교령’도 발표했고, 중국에 와있던 선교사들도 교리논쟁을 거쳐 중국식 전통을 거부했지요. 강희제는 격분해 “앞으로 서양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중국에 살 사람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못 박았습니다. ‘내 신민(臣民)이 되려면 오고, 저 멀리 로마에 있는 교황의 지시를 받으려면 얼씬도 말라’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강수(强手)를 두었지만 바로 탄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답니다. 북경엔 동서남북 네 개의 성당(천주당)이 그대로 있었고, 서양인 선교사들도 상주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허용하되, 선교는 금지’ 비슷한 처분이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현재 중국 당국이 천주교를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지요. 지금도 중국은 교황의 특권인 주교 임명권을 중국공산당이 사실상 행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비슷한 시기, 천주교 탄압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구체적 대응 방식은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교안’ 사건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 선교하다 발각된 사건입니다. 건륭제가 직접 각 사안을 챙기고 지시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지요. 당시 청나라 11개 성(省)에서 천주교인 400여명, 외국인 선교사 18명이 체포돼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옥중에서 병사(病死)한 사람을 제외하곤 사형을 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처벌의 강도도 내국인과 외국인이 달랐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종신금고형에 처했다가 1년도 안돼 사면해 석방합니다. 이때 등장한 단어가 ‘법외시은(法外施恩)’ ‘법외지인(法外之仁)’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중국 사정을 잘 모르고 국법에 어두운 외국인들(법외)이므로 은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선교한 것 외에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도 대지요. 반면 중국인들은 곤장을 맞기도 하고 변방으로 유배도 갑니다. ‘이중 잣대’를 들이댄 셈입니다. 이 교수는 이런 건륭제의 태도를 ‘파격적 은혜’라고 부릅니다. 또 “실제로는 건륭제 시절에 사형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처럼 대규모 박해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교수는 이런 ‘이중 잣대’의 배경으로 천주교가 지배체제를 부정하지 않은 점과 함께 그동안 황제가 선교사들에게 천문과 역법 관장을 위임하거나, 그림, 의료, 서양 기물에 관한 봉사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천주교 자체를 사교(邪敎)로 규정해버리면, 그동안 황제의 행위에 대한 정치적 권위와 도덕적 정당성이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선교사를 통해 유입된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이용하면서 지배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에선 용인한 셈입니다.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어쨌든 건륭제 연간 ‘대(大)’자를 붙일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천주교 박해 사건은 조선에 비하면 부드럽게 넘어갔습니다. ‘건륭제와 천주교’는 이런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주교 박해는 조선 못지 않았습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잡은 17세기초 천주교를 금지한 이후 발각되는 기리시탄(크리스천)은 온갖 고문을 당했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됐습니다. 당시 박해 상황은 일본의 엔도 슈샤쿠가 소설 ‘침묵’에서 절절히 묘사했지요. 일본 천주교 신자들은 메이지 시대에 와서 종교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250년 이상을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내외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외국인 선교사들도 예외없이 처형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중일 3국의 역사에서 천주교 탄압은 폐쇄사회로 향하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천주교 박해는 쇄국으로 이어졌고, 세도정치의 조선 역시 사회의 폐쇄성이 심화됐지요. 이 교수는 “청나라도 건륭제 다음인 가경제(재위 1796~1820) 연간부터 왕조를 유지하는 데 대한 자신감이 약해지면서 천주교 탄압의 강도가 세졌다”며 “이때부터 청나라의 쇠퇴가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종교의 자유로 상징되는 사회의 개방성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한 국가의 융성과 쇠퇴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종교의 자유는커녕 코로나 백신까지 거부하며 극도의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북한 상황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