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의 묘에서 발견된 백자사발지석에 쓰인 글씨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다산 전문 연구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가 지석 글씨와 다산의 생전 필체를 비교 분석한 결과다. 정 교수는 10일 자로 발행된 가톨릭평화신문에 이 같은 주장을 기고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초기 한국 천주교 역사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백자사발지석은 지난 3월 윤지충·권상연의 묘 발굴 당시 출토됐다. 백자 사발 안쪽에 무덤 주인의 이름과 세례명, 생년, 본관과 무덤 조성 일자 등 79자(字)가 적혀 있었다. 전주교구는 지난 9월 이 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10일 본지 통화에서 “지난 10여 년간 다산의 친필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다니며 실물을 확인하고 사진을 촬영했다”며 “이번 윤지충 묘 사발지석 사진을 보는 순간 매우 익숙한 글씨체, 즉 다산의 친필일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사발지석에서 나온 글씨체는 정자체인 해서(楷書). 정 교수는 이중 사발 바닥 글씨 등 47자를 ‘여유당시집’ ‘산재냉화’ ‘백운첩’ 등 다산의 해서체 글씨와 대조했다. 평평한 종이에 쓴 글씨와 사발 안쪽에 쓰는 글씨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과는 대조 샘플이 늘어날수록 필체의 유사도가 매우 높아진다는 것. 정 교수는 “고작 47자의 샘플 비교만 가지고, 이 글씨를 다산이 썼다고 단정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추사 김정희 등 다른 사람의 샘플에서 뽑아서 비교했을 때 이 같은 유사도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사발 글씨를 다산의 필체로 볼 수 있는 다른 근거도 밝혔다. 우선 윤지충과의 관계. 다산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고모로, 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이다. 윤지충이 천주교를 접한 것도 다산 형제를 통해서였다. 이 때문에 윤지충의 순교에 다산은 자책감을 가졌을 것이란 추측이다. 또한 다산의 거처인 양평 두물머리에서 도자기를 굽던 광주 분원(分院)은 지근거리다. 이 때문에 다산이 사발 안쪽에 글씨를 쓰고 분원에서 유약을 발라 구워 윤지충·권상연의 묘소로 옮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생활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회갑 때 스스로 쓴 묘지명에서 “정미년(1787) 이후 4~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며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윤지충·권상연의 순교 1년 후 이장할 때 분묘에 넣은 사발 글씨가 자신의 것이 맞는다면 다산은 적어도 1792년 말까지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핵심 지도층으로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지충·권상연의 이장은 한국 천주교 교회 차원의 행사였을 수 있다는 것이 정민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 3월 전주교구 초남이성지 조성 중 우연히 발견된 230년 전 최초 순교자 무덤은 우리 학계에 계속 연구거리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