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게 뭔가?
3년 동안 복원을 했다더니 왜 엉뚱하게도 철로 만든 현대식 다리를 갖다 놓은 것인가,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지난 5일, 3년 동안의 보수·복원 작업을 마치고 언론에 공개된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에 뭔가 독특한 것이 눈에 띄었다. 6·25 전쟁 때 부서졌다가 1953년 원래 자리와 반대인 향원정 남쪽에 건설된 취향교(醉香橋)는 분명 이번 공사에서 원래 자리인 북쪽에 제대로 복원됐다고 들었다.
연못 향원지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자 향원정은 오랜 세월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이 즐겨 감상하는 명소였고, 남쪽으로 난 평평한 다리(석재 교각, 목재 난간) 역시 그와 걸맞는 운치가 있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선 세종(한석규) 임금이 향원정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 궁녀 소이(신세경)가 종종걸음으로 그 다리를 건너오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향원정의 건립 연대가 1885년 무렵으로 밝혀졌으므로 고증 오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번에 북쪽으로 새로 복원된 취향교는 도무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보이지 않았다. 쭉 뻗은 교각 여섯 개, 마치 철로 만든 것 같은 질감의 하얀색 아치형 목교는 20세기에 건설된 것이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현대적이었다. 난간의 부재는 X자 형태였고 띄엄띄엄 소용돌이 모양의 철재 장식까지 있었다. 근대 런던이나 피리의 건축물 같은 분위기도 났다.
그런데 이 생경해 보이는, 얼핏 보면 고증이고 뭐고 대충 현대식으로 만든 것 같은 다리는 알고보면 철저히 고증에 따른 것이었다. 1901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촬영한 사진, 1903년 미국 장교 그레이브스가 촬영한 사진에 모두 이 ‘하얀색 아치형 다리’가 보인다.
이 같은 옛 사진에 대한 3D모델링을 거쳐 크기와 모양을 복원한 것이었다. 1885년과 1901년 사이에 취향교 중수 기록 같은 것이 없으니, 이 다리는 만들 때 이 형태로 지어졌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통 양식과 서양 양식을 결합해 지은 다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향원정’이란 건물이 철저히 근대의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향원정 다리가 북쪽으로 난 것은 그곳에 건청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청궁은 경복궁 중건이 다 끝난 1873년 고종 임금이 기존의 궁궐 구조를 무시하고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따로 만든 ‘궁궐 내 궁궐’이다.
건청궁 건립이 부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흔히 해석하지만, 군왕이 법궁을 버리고 구석에 숨었다는 것은 오히려 대원군을 포함한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건청궁은 단청이 전혀 없어 마치 궁 밖 양반 가옥 같은데, 이것은 열두 살 때까지 민간에서 살았던 고종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됐을 것이다. 훗날 왕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비극적 사건 을미사변(1895)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데 이 건청궁은 한국의 전기사(電氣史)에서 아주 중요한 장소다. 그러니까 향원정을 만든 지 2년 뒤인 1887년 3월, 건청궁 처마 아래 전등이 환하게 켜졌던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상용화한 지 불과 7년 뒤에 청나라·일본 궁성보다 2년이나 앞서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된 것이었다. 미국 에디슨램프사가 1만5500달러를 들여 설치한 전등이 밤을 대낮처럼 비춰 주는 신기한 풍경을 보러 궁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인산인해였다. 발전기의 냉각수는 향원정을 둘러싼 향원지에서 갖다 썼고(이 과정에서 물고기가 떼죽음당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향원정 주변에도 가로등이 설치됐다고 한다.
저 그림 왼쪽에도 보이듯 이 장소는 건청궁 입구인 동시에 향원정 입구이기도 하다. 건청궁 정문 맞은 편이 향원정으로 들어가는 취향교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리 모양은 잘못 그렸다.
일각에선 이것을 ‘고종의 근대화 의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건청궁 근처 임금의 서재인 집옥재 근처엔 조선 최초로 근대식 시계탑이 세워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향원지에선 겨울이 되면 외국인을 초청해 스케이팅 대회를 열었고, 고종과 왕비는 향원정에서 그걸 구경하며 즐겼다고 한다.
자, 이런 분위기에서 근대 양식의 다리가 향원정 앞에 놓여졌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고종이 지향한 그 ‘근대’의 성은(聖恩)이 도대체 궁궐 밖 민초들에게는 언제 영향을 미치게 됐느냐는 말이다.
국내 첫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된 것은 1898년의 일이었다. 고종이 미국인 콜브란의 조언을 듣고 만든 이 회사는 동대문발전소에 발전 설비를 만들고 전력 생산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가로등 3개를 설치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민간에 켜진 최초의 전깃불이었기에 1966년 이 날을 ‘전기의 날’로 제정했다.
에디슨의 전등이 궁궐 안에서 백성들의 거리로 나오는 데 무려 13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두 가지로 상반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①고종은 근대화의 산물을 먼저 궁중에서 구현한 뒤 하루빨리 나라를 근대화하려고 했으나 청일전쟁, 동학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1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백성의 거리에 전등을 설치하려는 뜻을 이룰 수 있었다. ②그게 아니라 고종은 근대 문명의 이기란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왕실(황실)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백성들이 그것을 향유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세상이 달라지니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이 지나가는 길에도 전등이 놓여지게 됐을 뿐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맞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경복궁 향원정이 지어진 지 25년 뒤, 건청궁에 전등이 들어온 지 23년 뒤, 그리고 종로에 민간 최초의 가로등이 세워진 지 10년 뒤에, ‘조선왕조의 불빛’은 영영 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복궁의 향원정은 그 쓸쓸한 ‘말기의 꿈’이 깃든 유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