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佛心)으로 내놓은 장욱진(1917~1990) 화백의 작품 110점이 45년 만에 아무 조건 없이 장욱진미술문화재단으로 돌아와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사장 김동건 변호사)은 16일 경기 용인 마북로 ‘장욱진 가옥’에서 ‘장욱진의 발원-김강유·이광옥 기증전’을 개막했다. 전시에 나온 작품은 모두 김강유 김영사 회장과 이광옥씨의 기증 작품. 이들은 40여 년간 소중히 간직해온 장 화백 유화 2점을 포함한 작품 110점을 재단에 기증했다.
인연의 시작은 1970년대 중반 금강경(金剛經) 공부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백성욱(1897~1981) 박사 문하에서 장 화백의 아내 이순경(101) 여사와 김강유(74)·이광옥(81)씨 등이 함께 공부했다. 1977년 무렵 백 박사는 장 화백 부부에게 법당(法堂)을 세울 것을 권유했다.
평소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통도사 경봉 스님으로부터 ‘비공(非空)’이란 법명을 받기도 했던 장 화백은 아내의 독실한 불심(佛心)을 응원했다. 그림을 시주한 것. 대표적 작품은 ‘팔상도’(1976). 부처님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일대기를 세로 35㎝, 가로 24.5㎝ 작은 화면에 유화로 그렸다. 그 후로도 틈나는 대로 불교와 관련된 작품을 그려 건넸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선물한 ‘진진묘’(1973)를 시주했다. ‘진진묘(眞眞妙)’는 이 여사의 법명.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1970년작 ‘진진묘’가 가는 필선으로 보살을 형상화했다면, 1973년작 ‘진진묘’는 둥글고 원만한 느낌. 가부좌(跏趺坐) 한 채 향합(香盒)에 향을 피우고 새벽 기도하는 아내의 모습을 유화로 그렸다. 1970년작 ‘진진묘’는 2014년 경매에서 5억6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그 밖에도 도자기에 그린 그림과 먹그림, 매직그림, 판화까지 장 화백의 시주는 1986년까지 계속됐다. 이번 전시에 나온 먹그림은 특히 눈길을 끈다. 장 화백의 평소 화풍은 작은 화면에 대상을 꼼꼼하게 유화로 그리는 완벽주의 스타일. 그에 비해 이번에 공개된 먹그림들은 일필휘지로 마음 가는 대로 속도감 있게 그렸다. 장 화백 장녀 장경수씨는 “오랫동안 서점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이사하면서 집에만 있게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을 권하면서 붓과 벼루, 먹을 선물하셨다”며 “언젠가부터 그 먹으로도 그림을 그리셨는데, 유화는 꼼꼼하게 그리던 분이 먹으로 그리면서 작품 크기도 훨씬 커졌다”고 말했다.
장 화백의 ‘그림 시주’가 이어지는 사이 백 박사는 세상을 떠났고 김·이씨는 금강경 독송회 지도법사가 됐다. 장 화백도 1990년 별세하고 시주받은 작품은 김·이씨가 보관했다. 법당 건립 비용은 다른 방법으로 마련했다. 그러다 올해 6월 두 사람은 장욱진재단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 “다행히 이 작품들을 팔지 않을 정도의 형편은 됐다”며 “제대로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겠다”고 한 것. 장 화백의 장남 장정순씨와 장녀 장경수씨는 기증받을 작품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장경수씨는 “작품뿐 아니라 부모님이 드린 도록과 달력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소중히 보관하고 계셨다”며 “아무 조건 없이 작품을 기증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이씨는 16일 오후 전시 개막 행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작품이 전시되는 고택(양관)은 장 화백이 1989년 서양 벽돌집을 모델로 지어 마지막 1년 반을 보낸 집이다. 집을 개조해 전시장으로 만들어 공간은 좁은 편이다. 기증작 110여 점을 모두 선보이지는 못하고 44점을 골라 전시한다. 재단은 예약을 통해 인원을 제한해 관람객을 맞고, 유화 작품 ‘팔상도’와 ‘진진묘’는 토·일요일 오후 2~5시에 공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