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중국 북부를 지배했던 여진족의 정복 왕조인 금(金)나라(1115~1234)의 시조가 신라계 고려인이었다는 국내 학계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중국 소수민족 전공인 김인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 재단의 신간 연구서 ‘전사들의 황금제국 금나라’에 실린 글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는 신라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함보’란 중국 정사(正史) 이십오사의 하나인 ‘금사(金史)’에 기록된 금나라 시조의 이름이다. 여기서 ‘함보는 고려에서 왔는데, 여진 땅에 도착했을 때 60여 세였고 부족 간의 대립을 해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국 측 기록인 ‘고려사’에도 ‘평주(현 황해북도 평산)에 살던 금준(今俊) 또는 김극수(金克守)란 사람이 여진 땅으로 도망가 금나라 선조가 됐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본 연구자들은 함보를 허구의 인물로 봤고, 중국에선 ‘고려 출신 여진인’인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비슷한 기록은 12세기 제3자인 남송(南宋) 필자가 쓴 ‘송막기문’과 ‘신록기’에도 나오는데, 여기선 시조의 출신지를 ‘신라’라고 했다. 금나라 황실 역시 ‘시조가 고려인’이란 사실을 인정했다. 금 태조 아골타(재위 1115~1123)는 “우리 시조가 고려에서 왔음을 잊지 말라”는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김 위원은 “‘함보’는 여진인이 아니라 신라인의 이름”이라고 지적했다. 국문학자 양주동(1903~1977)의 연구에 따르면 ‘보’는 신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인칭 접미사로 ‘이사부’나 ‘거칠부’ 등의 ‘부(夫)’와 통용됐으며, 현대어 ‘바보’ ‘느림보’ 등의 ‘보’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함보의 원래 국적이 신라와 고려로 엇갈리는 것은 그가 여진 땅으로 이주한 서기 920~930년이 신라와 고려가 공존한 시기였기 때문이며, 그의 출신지 평주는 당시 고려가 정복했던 땅이므로 함보는 ‘신라계 고려인’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다. 김 위원은 “시조가 신라계라고 해서 금나라의 역사가 한국사에 포함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