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
지난 15일 오전 서울 남산의 한 호텔 주차장. 앰뷸런스에서 내려 휠체어로 옮겨 타던 김모(63)씨의 마스크 너머에선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김씨의 손목엔 환자띠가 채워져 있었지요. 김씨는 담도암으로 경기 안양샘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있는 환자입니다. 김씨는 이날 ‘앰뷸런스 소원재단’(대표 송길원 목사)의 도움으로 ‘늦가을 나들이’를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난 11월 9일 발족한 앰뷸런스 소원재단은 말기 환자들의 ‘발’이 되어 가보고 싶은 곳에 나들이 시키는 봉사 단체이지요.
[임종 앞둔 환자들 소원은 나들이… 저희가 ‘발’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김씨는 지난 9일 이 재단 발족 후 ‘2호 환자’였습니다. 지난해 5월 발병 이후 큰딸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와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가족 나들이는 생각도 하기 어려웠지요. 앰뷸런스 소원재단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병원의 권유 덕분이었습니다. 당초 김씨의 ‘소원’은 화담숲 단풍 구경이었답니다. 3년 전 김씨 회갑 때 온가족이 화담숲 단풍 구경을 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는 16개월 된 막내 외손자도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에다 김씨가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선 유아를 병실에 데리고 가기 힘들어 몇주만에 한번씩 잠깐 만나거나 주로 동영상으로 만났다고 했습니다. 마침 둘째딸이 사는 곳은 남산에서 멀지 않은 금호동. 사연을 들은 재단은 ‘남산 단풍구경+외손자 만남’을 기획했습니다. ‘환자의 소원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병원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답니다. 수간호사가 동행해 김씨의 나들이 내내 수행하며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재단 측은 전날 남산 일대를 사전답사하면서 단풍도 보면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눌 공간을 수배했지요.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큰딸과 함께 호텔에 도착해 둘째딸과 외손자를 만난 김씨는 단풍은 안중에 없는 듯했습니다. 저 멀리서 손자가 보이자마자 휠체어에 앉은 채 두 팔을 벌렸고, 만난 후 30분 이상 시선은 손자에게서 떠날 줄 몰랐습니다. 손을 잡아보고, 얼굴을 쓰다듬고, 코를 쥐었다 놓으며 귀여워했지요. 반면 손자는 보통 꼬마였습니다. 처음엔 외할머니와 눈을 맞추더니 이내 유아용 동영상이 나오는 핸드폰에만 집중했지요. 딸들은 손자에게 할머니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라고 핸드폰을 할머니 얼굴쪽으로 대고 있었습니다.
김씨의 나들이는 그리 길지는 못했습니다. 오후에 남산일주도로를 돌며 단풍 구경을 한 후 김씨는 오후 2시반쯤 병원으로 향했지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내내 김씨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해 눈만 보였지만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딸들은 그 표정을 보면서 “기적이 일어나는 거 아닐까. 기적이 일어난다면 저 분들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13일 ‘1호 환자’의 나들이 목적지는 인천 을왕리해수욕장이었습니다. 췌장암 4기로 집에서 요양하는 방모(74)씨는 냉방기사였답니다. 여름이 가장 바쁜 철이었지요. 아내와 딸은 해외여행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여름철 온가족 여행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답니다. 그의 꿈은 ‘바닷가 노을 보기’였습니다. 아내와 딸이 함께한 드문 가족 나들이였습니다. 앰뷸런스 소원재단의 소방관 자원봉사자는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3층에서 방씨를 안고 내려와 앰뷸런스로 을왕리해수욕장으로 갔습니다. 카페도 들르고 바닷가 산책도 했습니다. 노을을 배경으로 가족 사진도 촬영했지요. 방씨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길원 목사는 평소 친분 있던 이만수 감독을 깜짝 초대했습니다. 이 감독은 방씨에게 사인볼을 선물했고, 방씨 가족의 나들이가 끝날 때까지 함께했다고 합니다. 방씨의 아내는 “최근 들어 남편이 가장 말을 많이 했다”고 고마워했답니다. 첫 날은 제가 동행하지는 못하고 재단 송길원 목사님께 사연을 들었습니다.
‘2호 환자’ 나들이 때는 돌발상황도 있었습니다. 앰뷸런스 소원재단의 본거지인 경기 양평을 출발한 앰뷸런스가 요즘 문제 되는 요소수가 부족해 경기 안양의 병원까지 갈 수 없게 됐답니다. 급히 SOS를 쳐서 병원의 앰뷸런스가 환자를 남산의 호텔까지 모셔오게 됐지요. 전화위복인지, ‘요소수 부족’ 덕분에 환자는 병원 앰뷸런스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소원재단의 앰뷸런스는 현행법에 따르면 침대를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뒤로 젖히는 의자에 앉아야 하거든요. 이 때문에 나들이할 환자를 선정할 때에도 이런 의자에 앉은 채 1~2시간 여행할 수 있는 상태의 환자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답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앰뷸런스는 환자의 병원 이송에 이용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말기 환자의 나들이’를 위해 앰뷸런스와 똑같이 차량 개조를 할 수는 없답니다. 법 탓만 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봉사는 ‘앰뷸런스 소원재단’이 처음이거든요. 소원재단은 법 개정을 위한 노력도 할 계획입니다. ‘환자 우선’으로 말이지요. 재단은 앞으로 장·노년 환자뿐 아니라 소아암 어린이들의 나들이 소원도 도울 예정이랍니다.
송길원 목사는 “2차례 나들이 때 봉사자들도 울음바다가 되곤 한다”며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일상이 어떤 이에겐 기적이란 것을 절감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