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점령기 유태인 학살 연구자인 얀 그라보프스키(59)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는 지난 2월 바르샤바 법정에서 진행된 명예훼손 소송에서 패소해 공개 사과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동료 연구자와 함께 낸 펴낸 책(‘끝없는 밤’·Nigth without End)때문에 유족으로부터 고소당했기 때문이다. 그라보프스키가 편집을 맡은 이 책은 폴란드인들이 유태인 학살에 공범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담았다. 그러자 유태인 고발 혐의를 받은 사람의 조카가 고인(故人)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그라보프스키 교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지난 8월 열린 항소법원은 하급심을 뒤집고 공개 사과를 안 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부와 친정부 단체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라보프스키 교수는 본지 이메일 인터뷰에서 “재판은 끝났지만 환상은 없다. 정부는 직접 또는 정부 돈을 지원하는 어용 단체를 내세워 압박할 것이다. 역사학자를 위협하고 재갈을 물리기 위해 더 많은 소송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선 유태인 300만명을 포함, 600만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폴란드는 유럽 최대의 홀로코스트 피해국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폴란드인 이웃의 고발로 게토나 수용소를 탈출한 유태인 2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고 징역 3년까지 처벌하는 ‘역사왜곡금지법’
그라보프스키 교수가 법정에 선 것은 2018년 2월 폴란드 의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폴란드 민족에 책임이 있다거나 공범이었다고 주장해 폴란드 민족의 명예를 더럽힌 사람을 처벌하는 법안(’민족기억연구소법’수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이 폴란드판(版) ‘역사왜곡금지법’엔 최고 징역 3년까지 처벌하는 규정이 포함됐다.
이 법안은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인권 단체인 국제 앰네스티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술을 처벌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조항은 철폐해야 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틸러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도 ‘언론과 학문의 자유에 역행한다’는 공개 성명까지 냈다. 학계도 들고 일어났다. 미국 역사학회(AHA)는 2018년 2월 9일 폴란드 두다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하자마자 ‘역사학자들의 언론의 자유와 역사 연구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라면서 법안을 재고해달라는 공개 성명을 냈다. 그 뒤 50개 넘는 학회·단체가 성명에 동참했다. 얀 그라보프스키 교수가 몸담은 캐나다 역사학회(CHA)와 오타와대도 ‘역사왜곡금지법’을 비판하고 그라보프스키 교수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런 비판 덕분에 형사처벌 규정은 삭제됐다.
◇극우 포퓰리즘 성향 ‘법과 정의당’의 獨走
폴란드판 ‘역사왜곡금지법’은 극우 포퓰리즘 성향 ‘법과 정의’(PiS)당이 주도했다. 2015년 재집권한 이들은 자녀 수당과 농가 보조금 지급, 최저임금 2배 인상, 연금 두 달 치 추가 지급 등 ‘퍼주기’ 재정 정책을 펴면서 국민들을 공짜 복지에 중독시켜 표를 얻었다. 언론과 검찰·사법부를 장악해 집권당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 물갈이했고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고취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폴란드는 나치 독일의 최대 희생자일 뿐 학살 공범이라는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라보프스키 교수를 법정에 세운 배후에도 정부 지원을 받는 관변 단체가 있다. 이 단체가 그라보프스키가 책에서 다룬 유태인 고발자의 유족을 찾아내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돈을 대고 어용 단체가 해결사를 자처하는 모양새다. 폴란드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는 유럽연합(EU)과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최악의 갈등을 빚고 있다.
◇여당 대선 주자의 ‘역사왜곡처벌법’ 공약
‘역사왜곡금지법’은 대선(大選)을 앞둔 국내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지난달 광주광역시를 찾아 ‘역사왜곡단죄법을 반드시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했다. 작년 말 여당이 단독 처리한 ‘5·18민주화운동법 개정안’(5·18역사왜곡처벌법)을 확대해 독립운동과 일본군위안부, 전쟁 범죄 등 현대사 관련 사건도 처벌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히겠다는 것이다. 5·18법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최고 징역 5년까지 처벌할 수있다. 광주광역시는 지난 5월과 6월 인터넷 게시물과 영상에서 위반 사례를 26건을 확인,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광주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22일 5.18을 왜곡하는 인터텟 게시물과 유튜브 영상을 올린 네티즌 11명에 대해 개정된 5.18특별법을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김용민 최고위원 등 여당 의원 12명이 만든 ‘역사왜곡방지법’도 국회에 상정돼 있다. 3·1운동과 4·19, 일제 지배와 독립운동 왜곡 등을 형사처벌하는 이 법안을 위반하면 최고 징역 10년형을 받을 수 있다. 여당 의원들이 지난 8월 발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법안은 ‘정대협’ 같은 위안부 단체의 명예훼손까지 최고 징역 5년으로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후원금 유용 혐의로 재판 중인 윤미향 의원까지 포함돼 논란이 됐다. 작년 양향자 의원이 의한 역사왜곡금지법안은 세월호 사건까지 포함시켰다.
◇학계의 ‘역사왜곡금지법’ 반대 성명과 침묵
역사학계는 지난 6월 9월 여당의 ‘역사왜곡방지법’에 대해 ‘특정한 역사관에 역사 ‘왜곡’이라는 올가미를 씌우고 처벌 조항을 명시하는 등 역사 문제를 과잉 사법화한다’면서 법안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 법안이 역사 왜곡을 금지한다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역사 전쟁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역사학회와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등 21개 역사 관련 단체가 참여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반대에 앞장선 단체들이다. 하지만 반년 전 성명서를 낸 이후, 여당 유력 대선 후보가 역사왜곡단죄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해도 별 움직임 하나 없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반대에 앞장서며 매일같이 항의 시위에 나섰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얀 그라보프스키 교수 소송을 맡았던 글로벌 로펌 덴톤스 소속 변호사 겸 폴란드 과학원 법학연구소 알렉산드라 글리시친스카-그라비아스 교수는 지난 21일 인터뷰에서 “언론 자유가 절대적이진 않지만 명확하고 필수적인 이유 없이 토론을 막는 건 민주 사회에선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왜곡금지법’ 논란에 대해 “의회는 과거와 역사를 통제하는 ‘기억법’을 도입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 당국이 기억법을 활용해 공개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덧붙였다. ‘(한국) 법안이 담은 형사처벌 수위는 매우 심각하다(of very significant severity).”
“학계 협박하는 정부, 역사에서 손 떼야”
얀 그라보프스키 오타와대 교수
얀 그라보프스키 교수<사진>는 나치 점령기 폴란드의 유태인 학살을 연구해온 권위자다. 유태인 학살에 폴란드인이 공모했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서 ‘유태인 사냥’(Hunt for the Jews)으로 2014년 야드바셈 국제 홀로코스트 저작상을 받았다.
그라보프스키 교수는 나치의 희생자 또는 저항자로만 폴란드 민족을 보려는 극우 포퓰리즘 성향 현 정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는 소송을 겪으면서 “(인터뷰나 공개 강연을 할 때) 문장 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매우 매우 신경 쓰게 됐다”고 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라보프스키 교수는 “이번 재판으로 역사학자들 사이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당국의 의도가 역사학자 한두 명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학계 전체에 이런 협박 메시지를 보내는 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감히 우리의 공식 역사 서술에 도전할 생각 하지 말라’”고 우려한다.
그는 지난달 유태인 강제수용소가 있던 폴란드 트레블링카 인근 마을에 폴란드 청년 얀 말레트카 기념비가 들어선 것에도 비판적이었다. ‘폴란드인이 학살 위기의 유태인을 도왔다는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기념물을 세웠다’는 것이다. 말레트카는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유태인들에게 물을 주려다 경비원들에게 총살당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인들이 유태인에게 물을 그냥 나눠준 게 아니라 다이아몬드와 금, 돈을 받고 팔면서 착취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정부가 (진실을 얘기하는) 역사학자들을 공격하는 걸 지지하는 대중이 있다. 대중은 민족사에 대한 불편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거짓에 기초한 좋은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라보프스키 교수에게 한국의 ‘역사왜곡금지법’을 소개했더니 명확한 답변이 돌아왔다. “정부와 당국이 (역사에 개입하지 않도록) 민족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게 해야 한다. 정부 역할은 대학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학자의 역할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다.”